김성수의 뮤직줌 <124>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작품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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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의 뮤직줌 <124>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작품83

천천히 들여다봐야 진실이 보인다…피아노 협주곡도 그렇다
특유의 ‘완벽주의’ 극명하게 드러나
고전적 구조·낭만적 감정 균형 탁월
교향곡처럼 네 개의 악장 구성 취해
“인간의 고독·충만함 공존 협주곡”

브람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느림’과 ‘깊이’를 되새겨본다. 디지털 정보와 감정의 과잉 시대에 사람들은 점점 더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익숙해지고 진지한 감정과 성찰의 시간은 사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인생에는 반드시 천천히 들여다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진실들이 있다. 어느 순간 찾아온 고독, 예기치 못한 상실, 말없이 감내해야 하는 책임들처럼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작품 83은 바로 그런 삶의 순간들과 닮았다.

이 곡은 젊은시절 비극과 고뇌를 지나 인간적 성숙과 따뜻한 유머에 이르기까지 한 작곡가의 내면 여정을 담고 있다. 그 안엔 격정도 있고 침묵도 있으며 깊은 공감이 자리하고 있다. 브람스는 이 곡을 통해 ‘삶은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는 음악이 있고 음악은 사람을 살게 한다’고 전한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브람스 그림


● 1번 초연 이후 22년을 품은 고백

브람스가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내림 나장조 Op. 83을 완성한 것은 1881년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이미 교향곡 두 곡과 다양한 실내악, 가곡으로 음악계의 중추적 존재가 된 그는 젊은시절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 겪었던 고통스러운 평가와 대중의 냉담한 반응을 지나왔다. 1번 초연으로부터 22년이 흐른 뒤 브람스는 자신감과 여유를 가지고 다시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장르에 도전했다. 이 곡은 브람스 특유의 ‘완벽주의’가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그는 클라라 슈만(Clara Josephine Schumann·1819~1896)에게 “이번 피아노 협주곡은 네 개 악장의 상당히 큰 규모로 웅장하고 달콤하고 때로는 귀엽고 우아한 곡”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겸손을 가장한 유쾌한 농담이었다.

당시 대부분 피아노 협주곡이 세개의 악장 구성을 취했지만 이 곡은 교향곡처럼 네 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브람스 특유의 대위법과 교향적 전개 방식이 돋보이며 트럼펫과 팀파니는 1, 2악장에만 사용돼 작곡가로서 자신감과 창조적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다.

브람스와 깊은 정신적 유대감과 감정을 나눈 클라라 슈만


● 리스트·슈만·제르킨·폴리니, 작품 극찬

이 곡은 브람스가 오랫동안 존경하고 친분을 유지해 온 헝가리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마르크스(Eduard Marxsen· 1806~1887)에게 헌정됐다. 마르크스는 브람스 초기 음악 교육을 이끈 인물로 그의 음악적 기초를 다져준 은인이었다.

초연은 1881년 11월 9일 헝가리 왕립극장(부다페스트)에서 이뤄졌다. 브람스가 직접 피아노 독주를 연주하고 지휘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음악적 동반자인 에르켈(Sandor Erkel·1846~1900)이 맡았다.

연주는 큰 호응을 얻었고 음악평론가인 한슬리크(Eduard Hanslick·1825~1904)은 “브람스는 이 협주곡에서 피아노를 오케스트라와 대립시키지 않고 하나의 구성원처럼 풀어낸다. 고전적 구조와 낭만적 감정의 균형이 탁월하다”고 했다. 이어진 독일 투어에서도 이 곡은 각 도시에서 찬사를 받으며 브람스의 입지를 견고히 했다.

당대 남녀 최고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1811~1886)와 클라라 슈만 역시 이 작품의 성숙함과 오케스트레이션의 정교함에 감탄을 금치 않았다. 특히 클라라 슈만은 “이 작품은 너무도 깊어서 한 번 듣고는 다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들을수록 브람스다운 진실함이 마음에 와닿는다”고 그녀의 일기장에 남겼다.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1903~1991)은 이 곡을 두고 “인간의 고독과 충만함이 공존하는 유일한 협주곡”이라고 말했고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1942~2024)는 “어느 순간 피아노가 말을 멈추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숨 쉬는 느낌이 드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 루돌프 제르킨은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2번에 대해 “인간의 고독과 충만함이 공존하는 유일한 협주곡”이라고 말했다.


● 악장별 특징-밀도높은 치밀함·기교 표현

I 악장 Allegro non troppo. 곡은 유려한 프랑스 호른 솔로로 시작되며 피아노가 이를 이어받듯 대화를 나눈다. 이 악장은 협주곡이라기보다 교향곡에 가까운 구조와 짜임새를 가진다. 피아노는 화려한 기교보다 교향적 흐름을 주도하는 데 집중한다. 브람스는 이 곡에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동등한 위치에 놓고 긴밀한 대화를 하듯 마치 피아노가 포함된 교향악적 통합을 시도했다. 서정성과 엄격한 형식미가 공존하는 이 악장은 브람스 자신의 내면 풍경처럼 펼쳐진다. 초연 전 브람스는 이 첫 악장을 프란츠 리스트에게 연주해줬는데 리스트는 한참 듣다가 중간에 잠들어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II 악장 Allegro appassionato. 보통 협주곡의 두 번째 악장은 느린 악장인 경우가 많지만 브람스는 스케르초풍 열정적이고 강렬한 악장을 배치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격렬한 대화를 주고받는 이 악장은 악장의 지시어에서 보여주듯 힘과 낭만적인 시적 긴장감을 일으킨다. 중간부는 단조의 드라마틱한 전개가 돋보이며 피아노 아르페지오와 스트레토(Stretto·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기법)가 격렬하게 몰아친다. 브람스는 피아노 기교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며 감정의 격정을 음악적으로 승화시켰다.

III 악장 Andante. 첼로 서정적인 독주로 시작되는 3악장은 실내악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피아노는 첼로의 선율을 감싸듯 응답하며 두 악기 간 우아한 대화가 펼쳐진다. 이 악장 첼로 독주는 협주곡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꼽힌다. 브람스는 이 악장을 클라라 슈만을 떠올리며 썼다고 한다. 첼로와 피아노의 응답은 브람스와 클라라의 깊은 정신적 유대감과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한 깊은 울림을 전한다.

IV 악장 Allegretto grazioso. 앞서 세 개 악장의 무거움을 해소하듯 마지막 악장은 명랑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전개된다. 브람스는 이 악장에서 가벼운 춤곡풍의 리듬과 헝가리 민속 음악의 리듬을 유쾌하게 섞으며 기교와 음악성의 정점을 보여준다.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Stephen Hough·1961~ )는 이 곡에 대해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마치 무게 있는 교향곡을 끝내고 조용히 와인을 들며 웃는 듯한 마지막 인사 같다. 진지함 속에도 유머와 인간미가 살아 있다”고 했다.

피아노는 이 악장에서 고난도 옥타브와 경쾌한 스타카토를 구사하며 음악적으로 밀도 높은 치밀함과 기교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브람스는 이 악장에서 “진지함 속에도 유머를 잃지 말 것”이라는 자신만의 미학을 실현했다.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 스티븐 허프는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2번에 대해 “진지함속에 유머와 인간미가 살아있다”고 평했다.


● 내면에 깃든 완숙의 음악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기술적 화려함을 넘어서 성찰과 절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긴 걸작이다. 네 악장에 걸쳐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충돌하거나 경쟁하기보다 교감하고 협력하며 한 편의 서사시를 써 내려간다. 그것은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고 음악으로 승화시킨 한 인간의 고백이자 인생 후반에 도달한 음악적 지혜의 정수다. 이 협주곡을 들어 본다면 한 악장 한 악장을 따라가며 브람스가 던진 질문들 ‘고독, 사랑, 예술, 그리고 인간’을 우리 삶 속에서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김성수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공연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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