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1년 당시 홍범도 장군. 사진 하단에 러시아어로 홍범도의 이름(ХОН НЕМ-до)이 기재돼 있다. 홍범도기념사업회 제공 |
![]() 두만강변 북녘을 배경으로 필자(왼쪽)와 방현석(왼쪽 세번째) 작가 등와 함께 |
“이족 침략자의 철제 밑에 짓밟히는 민족 앞에는 대개 세 가지 운명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법이다. 그 하나는 꼬리를 치고 나서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 잡아 잡수하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것이다. 그러고 마지막 하나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반항을 하는 것이다”
2024년 여름 범도루트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난 영웅들을 만날 수 있었다.
![]() 리위종 아버지 리범진의 자결 후 러시아로 가 육사를 졸업했으며 러시아에서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나무위키 제공 |
● 1905년 을사년 ‘을시년 스럽다’는 말 씁쓸
범도루트 마지막 글이다. 범도루트는 지난해 8월13~18일 5박 6일, 짧지만 굵은 여정이었다. 다녀온 직후 지난해 9월 말 연재를 시작으로 18번째 글을 쓰는 동안 해가 바뀌었다. 투어를 다녀온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계속 만주 대지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덧 을사년이다. 120년 전 을사년, 1905년은 암울했다. 오죽하면 ‘을시년스럽다’는 말이 생겼을까? 을사늑약 이후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 ‘을시년스럽다’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2025년 을사년, 연초부터 을씨년스럽다. 우리 모두, 꿈과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어쩌다가 범도루트에 참여하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지난해 5월경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는 자리였다. 창권은 “최근 보현이가 소설 ‘범도’를 보내줘 읽기 시작했는데 큰 울림이 있다”며 방현석의 장편소설 ‘범도’를 소개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고 나라가 시끄러울 때였다. 작금의 상황을 빗대어 보면 그 사건이 내란의 시작이었다.
소설 ‘범도’를 읽기 시작했다. ‘범도 1-포수의 원칙’ 632쪽, ‘범도 2-봉오동의 그늘’ 672쪽, 총 1302쪽이다. 제법 두껍다. ‘범도’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장편소설이다. 숨겨진 역사를 되찾았고 잊혀진 인물을 되살렸다. 믿기지 않은 사건도 있었지만 실제 상황인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 1권의 주무대는 북녘. 2권은 만주다. 특히 1권을 읽을 때 함경북도 지명을 찾고 그 루트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홍범도 진격 루트는 한국전쟁 때 미국이 패퇴했던 장진호 전투를 역으로 추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세 번째. 인물이 등장할 때 묘사가 섬세했다. 역사적 배경 설명까지 철저했다. 그러나 인물이 사라질 때는 한순간이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기억 속 동지를 빨리 망각하려고 했던 것일까. 네 번째. 화려한 묘사나 미사여구보다 간결한 표현, 현장성 중심의 글이 좋았다. 작가가 13년 동안 현장에서 조사·채록·분석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다섯 번째. 나와 동명이인이 소설에 등장했다. 설악산 전설적인 명포수 이쾌의 딸, 간장 종지도 한 방에 맞힌 명사수, 훈련대장 ‘이진’이었다.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당하기 전 풀어준 시계를 차고 있던 여전사 진포씨, 밀정에게 암살당하는 장면까지, 그녀를 쫓아가며 글을 읽어 나갔다.
![]() 臨敵先進 爲將義務 적을 만나 앞장서는 것은 장수된 자의 의무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
●친구 창권이 카톡방에 올린 범도루트 일정표에 필 꽂혀
어느날 창권은 친구들 카톡방에 ‘범도루트’ 일정표를 올렸다. 여러 친구들이 관심을 보였으나 창권과 창권의 딸 자영, 만원, 나 4명이 범도루트에 참가하기로 했다. 광복절에 백두산 천지와 장백폭포에 오르는 일정이 가장 맘에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나선 길이었으나 가는 곳마다 나의 무지에 대해 알게 됐다. 우리 역사가 외면하고 있었던 만주벌판의 역사와 영웅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선열들의 무장독립전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었다.
이번 연재 기사를 작성하면서 지면에 담지 못한 영웅과 장면이 있다. 소설 ‘범도’의 내용을 중심으로 나의 의견을 붙였다. 기억해야 할 영웅이다. ‘리범진(李範晋·1852~1911), 리범윤(李範允·1856~1940) 형제’다. 리범윤은 ‘간도의 맹호’로 불렸다. 고종이 그를 간도관리사로 임명했다. 리범윤은 간도에 정착한 우리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 호적부를 만들어 간도를 조선 행정체계에 편입시켰다. 청나라 관리의 횡포와 마적들로부터 우리 농민을 보호 하기 위해 고종에게 군대를 보내달라는 요청도 했다. 고종이 군대를 보내주지 않자 그는 자위 조직인 ‘사포대(私砲隊)’를 편성해 마적을 소탕했다. 사포대는 ‘대한의군’으로 불렸다. 안중근 부대도 리범윤 휘하였다. 리범윤의 형 리범진은 현직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였다. 리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자택에서 목을 매고 단총 세 발을 쏘아 자결했다. 리범진이 고종에게 남긴 유서다. “우리나라는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적에게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 앞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습니다. 1911년 1월 26일 리범진” 헤이그 특사 리위종(李瑋鍾·1887~?)은 리범진의 둘째 아들이다. 리범윤이 있었기에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안중근 참모중장도 있었다. 리범진이 있었기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몸부림이 있을 수 있었다.
![]() 범도 방현석 장편소설 |
김알렉산드라(1885~1918)의 죽음은 기억해야 한다. 조선인 노동자의 떼인 노임을 받아준 철도 노조의 전설인 김두서의 딸, 열다섯 살에 아버지 대신 통사(通事)가 된 소녀, 사범학교를 나온 여교사, 우랄 벌목장의 영웅, 우랄 빼르미 공단 노동자의 대변인,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자, 쏘비에트 극동인민정부 외교부 장관. 러시아 백군에 잡힌 그녀는 총살 직전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을 자리는 내가 정하겠다” 열세 걸음을 걸어 바위 위에 올라선 다음 “제가 방금 걸어온 열세 걸음은 제 심장에 새긴, 빼앗긴 조국 조선의 13도입니다. 조선 동포 여러분, 연해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가 밟아보지 못한 조선 13도에 여러분이 평등의 씨앗을 심고 해방의 꽃을 피워주십시오. 노동자, 농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일해온 극동인민정부의 외교장관으로서 저의 마지막 인사를 여러분께 전합니다. 볼셰비키 혁명 만세! 조선 독립 만세!!” 김알렉산드라는 개인적 편안한 삶보다 무산 계급의 해방과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산화했던 수많은 여전사 중의 한 명이다.
![]() 범도루트 5기 만주항일무장투쟁 역사학교 이동 경로 |
최재형과 그의 가족 이야기다. “연해주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이자 자산가다. 홍범도, 안중근 등에게 군자금을 제공한 그는 1920년 4월 7일 일본군에 의해 처형됐다. 일본군은 그의 시신마저 없앴다. 러시아는 그의 가족들을 일본 간첩으로 몰아 살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묻힐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외로운 영혼으로 돌아온 그의 허묘마저 없애버렸다” 서간도의 이회영 형제, 봉오동의 최진동 형제, 연해주의 최재형, 독립전쟁에 재산을 헌납한 수많은 민중, 그들이 있었기에 무장독립전쟁이 가능했다.
소설 ‘범도’ 중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장면이다. “전쟁에 져서 빼앗긴 나라는 있어도 국무를 맡은 자들이 문서에 도장을 찍어 팔아넘긴 나라는 동서고금에 없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너무도 가슴 아픈 글이다. 토착 왜구들이 발호하는 현실이다. 역사가 반복되면 안 된다.
안중근이 홍범도에게 했던 말이다. “제가 적의 수괴 한 두를 잡는다고 해서, 장군님께서 일본군 수백, 수천 두를 잡는다고 해서 물러날 일본이 아니겠지요. 그걸 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싸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니까 싸우는 것이지요” ‘臨敵先進 爲將義務(임적선진, 위장의무, 적을 맞아 먼저 전진하는 것이 장수의 의무다)’ 안중근 참모중장의 유묵을 보고 있는 듯하다.
홍범도 장군이 고려령 1고지를 떠나기 전(청산리 전투)에서 주저하는 지휘관들에게 남긴 말이다. “나라가 망한 이래로 우리가 의병이 되어 목숨을 내걸고 싸운 것은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어서는 아니었소. 이기고 지고를 떠나 오직 의로써 싸워왔소. 그렇게 싸우다가, 저격여단의 창설자 김수협과 항일연합포연대의 청년중대장 현창하, 부중대장 이정재,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전사했소. 박한과 리범진은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며 항거했고 허위와 박장진이 장렬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소. 그들이 싸워왔기에 오늘의 싸움이 있소, 우리가 포기하지 않아야 언젠가, 대한의 누군가가 못 다한 우리의 이 싸움을 이어갈 것이오. 그렇지 않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의로운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 범도루트 깃발 |
홍범도와 지청천과의 대화다. “장군님도 독립이 되면 하시고 싶은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포수는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자요, 무엇을 만드는 자가 아니오, 나는 부술 것만 확실히 부수고 갈 테니, 지사령관은 독립하는 그날이 오면 다시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나라를 만드시오” “그런 날이 올까요” “그날은 밤의 도둑처럼 올 것이오” “그 도둑이 오늘밤에 왔으면 좋겠습니다” 백무아의 언어 ‘밤의 도둑처럼’이 있다. 지청천은 1933년 7월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함께 무장독립전쟁 3대 대첩으로 평가받는다.
‘범도’의 방현석은 “백년 전 홍범도와 백무아가 억압과 차별, 불의를 향해 발사한 마지막 한 발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착하지 않았다. 일격필살의 저격수였던 그들의 탄환은 빗나간 적이 없으므로 반드시 표적의 정중앙을 관통할 것이다”라며 범도의 길이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고 있다.
무장독립전쟁에 나섰던 선열들은 일제의 총칼에 죽고, 고문에 죽고, 맞아서 죽었다.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었다. 흔적도 없이 죽어갔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았다. 끝까지 싸웠다. 범도루트는 선열들이 투쟁했던 현장과 산화했던 역사, 즉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갔던 비범한 길을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범도의 길, 만주 벌판 곳곳엔 장렬한 죽음의 지층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토양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진정한 독립 국가, 더 좋은 민주주의 나라로 우뚝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24년 만주에서의 여름휴가, 그곳에서 만난 범도루트의 동지들, 방현석 작가에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많은 독자들이 소설 ‘범도’를 읽고 ‘범도루트’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이진 광주광역시의회 운영수석 전문위원
![]() 이진 광주광역시의회 운영수석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