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1부대 죄증관 외관, 시체를 불살랐던 소각장의 굴뚝이 디자인으로 남았다. |
![]() 731부대 초대 부대장 이시이시로의 세균전 옹호발언. 그는 미군에게 731부대 자료를 넘겨주면서 어떠한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
그는 “731부대 표본실에 영유아 표본이 적지 않았습니다. 수년 동안 손주를 볼 때마다 당시 표본실에서 봤던 영유아 표본이 떠올랐습니다. 매번 생각이 날 때마다 고통과 죄책감을 느꼈습니다”며 731부대 만행을 알렸다.
● 중국 문화부, 1982년부터 침략현장 보호·관리
하얼빈 시 외곽 핑팡(平房)구 신강대가(新疆大街) 47호. ‘중국침략 일본군 731부대 죄증 진열관(이하 ‘731전시관’)’이 있다. 과거 731부대 유적지는 넓은 폐허에 각종 세균실험실과 특수감옥, 수감실, 소각구덩이, 군부대 등 잔존 건물과 그 잔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일제는 패전 선언 하루 전 건물을 폭파하고 서류를 소각했다. 각종 모든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다. 일제는 마루타(丸太)들의 밥에 청산가리를 타 죽이거나 총으로 집단 학살하고 시체를 태웠다. 시체를 소각했던 소각장 굴뚝은 상징화된 디자인으로 남아 인류사 최고 악행을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현재 일본 관동군 731부대 인체실험 만행의 각종 자료를 전시할 뿐 아니라 범죄 죄상 자료를 수집·보관·연구하는 기관이다. 유적지 옆에 조성된 ‘731전시관’은 2015년 8월15일 개관했다.
중국 정부가 일제 침략 현장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부터다. 중국 문화부는 ‘문서 1289호’를 통해 ‘모든 성, 직할시, 자치구의 문화국과 문화관리위원회에 일본의 중국침략 현장을 보호하라’고 통보했다. 이 문서를 근거로 헤이룽장성과 하얼빈시는 방치돼 있던 731부대 옛 범죄 현장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유적 조사는 1987년부터 시작됐다. 1992년 4월 731부대 인체실험 자료를 공개했다. 1993년 8월 731부대 세균전 자료 등을 발견했다. 1995년 7월 ‘1940년 731부대의 세균전은 육군참모본부 지시와 당시 일왕의 승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문서도 발견했다. 1998년 731부대의 인체실험에 이용된 사람들의 이름과 실험 시간, 장소, 체포 경위, 심문 내용, 인체실험 결과 및 인적사항이 기록된 문서와 이를 촬영한 사진 원본을 연이어 찾아냈다. 731전시관과 유적은 ‘하얼빈시 중점문물보호단위’이자 ‘4A 국가급 여유경구(國家級旅遊景區)’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이곳은 ‘UN으로부터 전쟁범죄로 규정된 세균전과 생화학전 등 일제의 죄상’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 러시아 모녀를 대상으로 진행한 독가스 실험 |
731전시관은 중국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가이드 선생은 “중국은 반일 교육과 함께 중화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상급학교를 진학하려면 반드시 이곳과 같은 ‘애국주의 교육기지’를 방문해야 하고 그 증빙을 제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라며 아침 일찍 도착해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비록 소수이지만 일본인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전시관을 나갈 때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리거나 중국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라며 일본인의 방문에 관해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오전 8시경 도착했다. 9시 개관인데도 벌써 긴 줄이다. 아침부터 30도 더위다. 9시가 되자 음성안내기를 받아 전시관에 입장했다. 상당히 정확한 한국어 발음이었다. 각종 사진이나 자료 하나를 잘 설명해 주었다. ‘731전시관’의 첫 장면은 ‘비인도적 잔학행위’라는 거대한 글귀다. 중국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 몽골어, 러시아 6개 언어로 적혀있다. 입구에서부터 집중하게 만든다. 위에서부터 4번째가 한국어다. 아마도 실험대상으로 죽어갔던 사람들과 가해자의 국적을 의미한 것 같았다.
731전시관은 총 6개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제1부분 일본군 세균전 체제, 제2부분 731부대(본부/파견), 제3부분 인체실험(세균 연구, 백신 연구, 기타 동·식물바이러스 연구, 세균 인체실험, 소각로, 인간 외 세균실험, 기타 인체실험, 특별이송), 제4부분 세균무기 개발(세라믹 폭탄 개발·세균전 무기 생산), 제5부분 세균전 실시(노몬한(몽골국경)세균전, 중국 영토 내 세균전), 제6부분 전후 재판(전범재판, 전후 미·일거래) 등으로 구성됐다. 이 중 제3부분 인체실험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출구로 나오는 공간의 벽에는 ‘생화학무기 사용금지 국제협약’ 전문이 표시됐다. 출구는 암흑의 공간에서 광명의 공간으로 나오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 비인도적 잔학행위 전시관입구 |
731부대의 정식 명칭은 ‘관동군 검역 급수부’다. 가짜 간판을 걸어 놓고 실제로는 민간인 인체실험이 자행했다. 일본총영사관이 외교기관이란 간판을 포장하고 살인과 고문을 자행했던 것과 흡사했다. 731부대는 1936년 일왕의 비밀지령으로 설립됐다. 1938년에는 부지 16만㎢에 70개 건물을 포함한 80개 시설을 설치했다. 총넓이 6㎢ 본부 지역과 하얼빈 시내 난둥 주둔지, 야외 실험장을 건설했다. 1943년 세균 공장과 안다(安達) 비행장 기지 등을 포함해 거대한 규모의 ‘세균배양과 생산기지’를 세웠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일왕은 1940년 중국에서 세균무기를 시험·사용하도록 직접 재가했다. 1940년 이후 세균무기의 연구, 생산, 실험장은 중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길림성 100부대, 북경 1855부대, 남경 1644부대, 광동 8604부대 등이 존재했고 그 중심에는 일본제국대학이 있었다. 초대 부대장은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출신 의사이자 세균학 박사, 이시이 시로(石井四郞)다. 그의 지휘 아래 수천 명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진행했다. 이시이 시로는 일제 패망 후 731부대의 자료를 미국에 제공했다. 그 대가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일왕의 칙령으로 731부대가 설립·운영됐으나 일왕뿐 아니라 731부대원들도 99% 이상은 전범재판을 받지 않았다. 1949년 하바로브스크에서 열린 극동군사재판에서, 소련군에 체포된 731부대원 중 12명이 세균전범으로 재판을 받았을 뿐이다. 뉘른부르크 재판에서 나치의 인체실험에 관련된 독일 의사들이 단죄됐다. 그러나 미국이 일제 731부대에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이시이 시로는 미국의 비호 아래 천수를 누렸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후 미·일거래, 국제정치의 현실은 잔인했다. 이것은 미국의 죄상이다. 민주주의 국가를 천명하는 미국이 인류의 억울한 죽음을 무시하고 실험 데이터만을 선택했다.
![]() 시체 소각로와 굴뚝 |
731부대는 인체실험 대상자는 ‘특별이송대상’이었다. 731부대와 관동군 헌병대에 의해 ‘특별이송’ 대상으로 분류되면 재판 없이 비밀심문을 거쳐 731부대로 이송했다. 731부대의 잔학한 만행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5년 동안 이어졌다. 희생된 마루타만 최소 3600명. 이곳에 들어와 살아서 나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공중 살포 세균전으로 인한 피해자도 수만 명에 달했다. 독가스 사용과 세균전용 인체실험 대상에는 전쟁포로뿐만 아니라 반일·항일 활동가와 사상범, 생활 범죄자, 심지어는 주민까지도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곳의 자료와 전시물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인체실험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상을 단적으로 증언해 주는 대표적 죄증(罪證)들이다.
![]() 안다비행장에서 실시한 페스트균 공중살포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
731전시관 제3부분은 인체실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몇 가지를 소개한다. 우선 각종 세균 주사다. 일제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탄저균, 티푸스균 이질균, 천연두균 등 바이러스균을 주사했다. 한인 독립운동가 40여 명을 체포해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인체실험을 했다는 기록도 발견됐다. 두번째, 민간인 지역에 세균을 살포했다. 부대 안에서 배양해 쥐, 벼룩을 가축에게 감염시켜 민가 마을에 방출했다. 세번째, 동사(凍死) 실험이다. 손부터 얼려 영하 50도까지 온도를 낮춰가며 언제 어떻게 사람이 죽어가는지 실험했다. 네번째, 독가스 실험이다. 러시아인 모녀를 실험실에 가둬 놓고 누가 먼저 죽는지, 몇 분 후 죽는지, 카메라로 촬영했던 장면이 밀랍인형으로 재현됐다. 다섯번째, 페스트균을 공중에서 투하했다. 안다 비행장에서 공중에서 페스트균을 터트리고 묶여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여섯번째, 총기 관통력 테스트다. 간도대학살 때 일본군이 한인들에게 저지른 만행 중 하나다. 사람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을 쐈다. 한발에 몇 명이 죽는지 실험했다. 일곱번째, 살아있는 사람을 마취없이 해부하고 동물 내장과 교체하기도 했다. 그 외 사람이 얼마나 견디며 죽는지 실험했다. ①저진공 상태 ②강제 단수, 물을 끊어 죽이기 ③기아(飢餓), 굶겨 죽이기 ④건조 또는 물먹이기 ⑤담배 연기 주입 ⑥각종 마취제 테스트 및 약물 실험 ⑦전기 고문 또는 감전 ⑧열수 화상 또는 화공 ⑨공기정맥주사와 거꾸로 매달기 ⑩피를 얼마나 흘리면 죽는지 실험하거나 인마혈 교환주사 ⑪장기 이식(소장과 식도 연결 또는 동맥 및 신경 절단) ⑫고속 원심분리기 실험이나 최면실험 ⑬인공수정 ⑭공기정맥주사 ⑮매독균 전파 등이다. 상상하기 힘든 인체실험을 자행했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공포를 느꼈다. 인간이 얼마나 악마화될 수 있는지도 확인했다.
![]() 영하 50도 까지 온도를 낮춰 가면 언제 어?게 죽는지 동사실험했다. |
전시관의 마지막 부분의 화면이다. 철증여산(鐵證如山·확실한 증거가 산더미 같다)이라는 글귀와 함께 지금까지 수집된 죄증 자료를 숫자로 표시했다. ①1만2912건(증거 수집된 소장품) ②8000페이지(기밀해제문서·세균인체실험보고서 조사보고서) ③423시간(731부대 부대원들의 영상 증언) ④1567건(피험자의 특수이적 파일) ⑤136건(노동자의 증언) ⑥1615쪽(전범 16명의 재판기록) ⑦3497명(731부대의 인사파일) ⑧27개 유적(세균실험실 등) 이것이야말로 일제가 은폐하려고 했지만 은폐하지 못한 명백한 증거다. 현재 일본 정부는 731부대 세균전 자행 사실을 부인할 뿐 아니라 전쟁 가해 책임도 회피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국제정치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고 일본 정치도 변화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진 광주광역시의회 운영수석 전문위원
![]() 이진 광주광역시의회 운영수석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