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8.06.안중근 참모중장의 국내진공작전을 설명하고 있는 방현석 작가 |
![]() 범도루트 대원들이 안중근 참모중장을 추모하고 있다. |
![]() 안중근 참모중장의 혈서 |
가이드 선생은 “중국인들의 새치기를 대비해 앞사람과 뒷사람의 공간이 없어야 합니다”며 신신당부다. 우리는 촘촘한 대형을 갖추고 대비했다. 개찰 시간이 되자마자 우리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중국인들은 새로운 오와 열을 형성해 밀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대형은 붕괴되고 말았다. 고속열차를 타는 과정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하마터면 기차를 놓칠 뻔했다. 중국인들은 상술만 최고인 줄 알았는데, 새치기는 기네스북감이라고 생각했다.
● 안중근 ‘의사’ 아닌 ‘참모중장’으로 불러야 마땅
고속철도 허셰호(CRH)를 타고 4시간, 광활한 만주벌판을 달렸다. 기차 안에는 판매원이 간단한 식음료를 팔기도 하고 식당칸도 따로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소주와 중국 맥주의 하모니는 환상적이었다. 중간에 ‘부여역(扶餘驛’)이 있었다. 국사 시간의 ‘부여’, 여기인가? 반갑기도 했다. 어느덧 ‘하얼빈서역’에 도착했다. 하얼빈은 헤이룽장성 성도(省都)다. 여진족 언어로 ‘그물을 고치는 곳’이란 뜻이다. 19세기 말 러시아가 조성한 도시다. 러시아식 성당인 ‘소피아성당’이 랜드마크 중 하나다. 인구 1000만명 이상으로 중국 10대 도시에 속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송화강엔 조명을 밝힌 유람선도 많았다. 남녀노소 수영하기도 했다. 활기차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강변엔 고층빌딩이 즐비했고 ‘태양도’라는 하중도엔 놀이동산도 있다. 그곳으로 오가는 케이블카도 분주했다. 한겨울엔 세계적인 빙등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늦은 밤엔 호텔 근처에 ‘중앙대가’를 걸었다. ‘불금’은 세계 공통인 듯, 하얼빈 사람들 모두 이 거리로 나온 듯했다. 인파에 밀려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중국에 부자가 많다더니 곳곳 명품상점에 사람들도 많았다.
하얼빈에서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인민음악가 정율성 기념관’, ‘일본군 731부대 죄증 진열관’을 둘러볼 계획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가는 도중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의 강의가 시작됐다. 안중근은 ‘의사’로 부르지 말고 ‘참모중장’이라는 부르자는 것이다. “안중근 참모중장을 ‘안중근 의사’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그는 1908년 6월 대한 의군 우영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대한 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이하 이토)를 격살했습니다. 특수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한 군인이었습니다. 이토를 격살하고 난 뒤 일제의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도 ‘나는 대한 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를 죽였고 또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인데 지금 일본 법원 공판정에서 심문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중에 붙잡혔으니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취급하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는 참모중장으로 모든 것을 자신이 구상하고 결행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동지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안중근을 참모중장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안중근을 ‘의사’라 호명한 친일정권의 명명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묵은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였습니다. 그는 군인으로 임무를 완수했고 철저한 군인으로 최후를 마쳤습니다. 누가 감히 안중근 참모중장을 의사라 부르는가? 그건 군인으로 살고 군인으로 죽은 그에 대한 능멸입니다. 저와 범도루트 대원들이 그를 ‘안중근 참모중장’이라 쓰고 부르게 된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든든합니다. 작은 보람을 느낍니다” 범도루트 대원들은 안중근을 참모중장으로 부르기로 했고, 하얼빈과 뤼순을 담당하는 가이드 선생도 “저도 방현석 교수의 영향을 받아 안중근을 참모중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안중근이 이토를 격살할 때 사용했던 브라우닝 권총. 총기번호는 262336이다.책 "대한국인 안중근"(김호일 엮음)중에서 |
![]() 하얼빈역 뒤 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동판 |
![]() 소피아성당 러시아식 건축물로 하얼빈의 랜드마크 중 하나. |
● 이토 격살 현장 보존…벽시계 거사시간 9시30분 고정
하얼빈 안중근 기념관은 2019년 3월 30일 이곳에 재개관했다. 기념관의 특장점은 안중근 참모중장(이하 ‘안중근’)이 이토를 격살한 역사적 현장에 입지했다는 점이다. 2013년 6월 베이징 한·중 정상회담 때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하얼빈역에서 안 의사의 거사 장소를 알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수락해 2014년 1월19일 개관했다. 이 과정에 한국 여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교수의 숨은 공헌이 있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얼빈역사를 확장하면서 잠시 다오리(道里)구 안성(安昇)거리로 이전했다가 재개관했다. 면적도 기존 기념관의 두 배 규모로 늘어났다.
기념관은 역 뒤편 광장에서 들어갈 수 있다. 외벽 동판엔 ‘안중근의사기념관(安重根義士紀念館)이라고 깔끔하게 표시돼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안중근의 전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빛을 형상화한 은빛 장식이 동상 주변을 감싸고 있다. 위에는 거사 시간 9시 30분에 고정된 원형 벽시계가 있다. 기념관 서언 중 일부를 소개한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조선반도에서 온 항일의사 안중근이 할빈 기차역에서 당시 일본 추밀원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사건은 세계를 경악케 하였다. 할빈 지방사에 중대한 역사 사건으로 기재된 이 장거는 당시의 일제침략항쟁과 반파쑈투쟁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주은래 총리는 ‘중일 갑오전쟁 이후 본 세기 초,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였다. 양국 인민이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주은래의 언급을 적시한 것은 중국 정부가 안중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념관은 안중근 가계도로 가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의 사진도 전시됐다.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사상, 거사 및 뤼순(旅順) 감옥에서의 순국 과정 등을 알 수 있다. 마치 안중근의 생애사 박물관과 같다.
안중근이 집을 떠나며 지은 시다. “사나이 큰 뜻 품고 타국으로 떠나가니/살아서 성공 못하면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유골을 구태여 선조의 무덤 옆에 묻으랴/세상엔 가는 곳 마다 청산이 무진한데”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형장에 이슬로 사라지는 자신의 미래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 안중근참모중장 동상 |
●안중근, 일본군 포로들 석방…의병부대 분열 초래
안중근의 인생에서 ‘일본군 포로 석방’은 중대한 사건이다. 그는 1907년 연해주에서 의병부대 창설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 1860~1920)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동의회는 연추(煙秋·Yanchikhe)에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기 위한 준비 단체였다. 최재형은 당시 그 지역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로서 의병 후원에 앞장선 인물이다. 의병부대를 결성한 뒤 1908년 6월 국내로 진입했다.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노면(蘆面) 상리(上里)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한 것. 이 작전에서 교전 끝에 일본군 진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안중근은 포로를 타이르고 만국공법에 따라 이들을 석방했다. 포로들이 무기를 가져가지 않으면 처벌받는다고 애원하자 무기까지 돌려줬다. 이것은 화근이 됐다. 안중근 조치로 의병부대는 분열됐다. 엄인섭 부대는 러시아로 돌아갔다. 안중근 부대도 뿔뿔이 흩어졌다. 일본군 포로가 일본 군대를 끌고 와 기습 공격했다. 안중근은 한 달 만에 겨우 살아 돌아왔다. 패전지장이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최재형도 지원을 끊었다. 그러나 모두가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며 안중근을 위로하며 환영대회를 개최한 한인들도 있었다. 이후 안중근은 단지동맹 등으로 새로운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한다. 아마 이때 안중근은 자신의 판단 때문에 많은 동지들이 희생당했다고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침략 원흉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의 동지들과 이토를 격살하기에 이른다.
기념관의 하이라이트는 ‘이토 격살 장면과 현장’이다. 사진과 삽화 등으로 그 장면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토 진단 도면도 있다. 총격이 어디에 이뤄졌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안중근이 사용했던 권총 M1900 권총 사진도 전시됐다. 격살 현장은 전면 유리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념관은 직사각형 모양이다. 입구로 들어와서 왼쪽 방향으로 전시가 진행된다. 전시물을 따라가면서 막바지에 전면 유리창이 나타난다. 유리창 밖은 하얼빈역 플랫폼이다. 현장감 있는 설계가 인상적이다. 바닥엔 ▲와 ■가 있다. ▲는 안중근의 위치고 ■는 이토의 위치다. 7m 거리다. 7발 중 3발을 이토에 적중시켰다. 나머지 3발도 수행원에게 적중했다. 이토는 20분 뒤 절명했다. 방현석 작가는 “독립군 중 권총을 가장 잘 쏘는 이는 안중근 참모중장이고 소총을 가장 잘 쓰는 이는 홍범도 장군이었다”라며 현장을 설명했다. 범도루트 일행은 그 현장을 바라보며 “백발백중 일격필살”을 외치며 안중근 참모중장을 기렸다. 이진·광주광역시의회 운영수석 전문위원
![]() 이진·광주광역시의회 운영수석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