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던 오월불꽃 들불로 확산…'민주주의 성지'로 부활
기획

타오르던 오월불꽃 들불로 확산…'민주주의 성지'로 부활

해방광주·절대공동체 구축 감동
시·도민들 자체 질서·치안 유지
골목마다 솥 걸고 주먹밥 만들어
다친사람 위해 줄지어 헌혈 나서
주유소 시위차량 연료 지원 응원
함평 군민들 광주 참상소식 분노
무안·해남경찰서 급습 무기획득

함평군 학교면 원사거리. 80년 당시 광주와 목포를 이어주는 길목으로 1번국도가 지났다.
그해 오월 남도는 하나였다 5·18 전남사적지를 가다 9 함평-시위차량에 무상주유 '힘내 싸워라'







집집마다 쌀을 내놓고 골목에다 솥을 걸어 밥을 지었다. 소금 간을 해 주먹밥을 만들고 맨밥 한 주걱에다 김도 말았다. 노점 상인들은 쌈짓돈을, 청과상은 과일을 풀었다. 슈퍼에선 마실 것과 주전부리를 내놨다. 내놓을 것 없는 사람들은 먹고 마실 것을 배달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가 그렇게 했다. 먹을거리뿐 아니다. 다친 사람 치료를 위해 줄지어 헌혈했다. 병원마다 피가 남아돌았다. 시민 스스로 질서와 치안도 유지했다. 현명한 수습을 위해 머리도 맞댔다. 이 시기를 '해방광주'라 부른다. '절대공동체'라고도 한다.

시위대가 무기를 획득하려고 찾은 당시 대동지서 터. 지금은 대동면사무소와 파출소가 자리하고 있다.






●시위대 가는 곳마다 주먹밥·무상주유 등 응원

높은 시민의식과 아름다운 공동체의 상징인 주먹밥은 전남에서도 나왔다. 목포 중앙공설시장, 해남읍교회와 강진읍교회를 비롯 화순, 나주, 무안 등 시위대가 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다. 함평군 학교면 주유소에선 시위 차량에 기름까지 그냥 넣어 줬다. 휘발유, 경유 가리지 않고 연료통을 가득 채워주며 응원했다.

함평에서 보여준 또 다른 형태의 '주먹밥'이었다. 주먹밥은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연대였다. 계엄군과 싸움에서 이기는 힘이었다. 큰힘을 얻은 시위대는 목청 높여 광주 참상을 전하며 주민 궐기를 호소했다.

5월 21일 공수부대의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광주 시위대가 함평군 학교면 원사거리에 도착했다. 1번 국도에 자리한 학교면 원사거리는 당시 광주·나주와 무안·목포를 오가는 길목이었다. 함평읍으로도 연결됐다.

버스와 트럭을 타고 온 시위대는 함평군민에 공수부대 시민학살 사실을 알렸다. 주민들이 박수로 호응하며 모여들었다. 시위대에 물과 음료도 건넸다. 시위 차량에 내걸라며 태극기를 모아 주기도 했다.

옛 학교역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급수탑.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해주던 시설이다.






●학교역 광장·학다리초교서 "계엄철폐" 외쳐

광주 시위대는 학교면으로 향했다. 지역청년들과 만난 시위대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시위대는 학교역 광장과 학다리초등학교 운동장을 오가며 '계엄철폐', '민주쟁취'를 외쳤다.

광주 참상을 전해 들은 지역민들은 분노했다. 당시 광주와 전남은 '남'이 아니었다. 형제와 자매, 친구와 이웃이 광주에 많이 살고 있었다. 생활 공동체였다. 광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함평군민의 감정은 더 달랐다.

몸집을 불린 시위대가 '광주로 가자!'며 학교역 광장을 떠났다. 일부 시위대는 무안·목포 방면으로 내려가며 시위를 계속했다. 한 무리는 함평읍 쪽으로 진출했다. 학교면 원사거리엔 22일 이후 군부대가 머물며 도로를 막고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23일 낮엔 군인들이 무안 방면에서 올라오는 차량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민간인 2명이 총상을 입었다.

옛 학교역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급수탑.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해주던 시설이다.






그해 5월 뜨거웠던 절규가 학교면 원사거리와 옛 학교역 광장 5·18사적지 표지석에 새겨져 있다. 학교역 터에 남아있는 급수탑도 눈길을 끈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학다리초등학교는 다른 학교와 합해져 지금은 학다리중앙초등학교가 됐다.

합평읍내와 어우러진 함평공원 전경. 함평공원 아래 옛 사거리는 함평읍장이 주도하는 결의대회가 열린 곳이다.






● 시위대, 무안·영광 이동…광주진입도 모색

21일 오후 광주 시위대가 함평읍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계엄철폐', '전두환 처단'을 외치는 시위대를 본 군민이 몰려 들었다. 일부 군민은 시위차량에 올라 함께 구호를 외쳤다. 상가에선 빵과 음료를 가져왔다.

시위대는 경찰관서 무기고를 찾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무기고는 비어 있었다. 경찰관서 무기는 며칠 전 지역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717대대로 옮겨진 뒤였다. 미처 옮기지 못한 총기도 몇 정 있었지만 실탄이 없었다. 일부 시위대는 717대대 경비초소로 달려가 총기를 요구했다. 대대장의 차분하면서도 강단 있는 설득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영광 불갑테마공원에 세워져 있는 박관현 열사 동상.






시위대는 함평 관내 읍면은 물론 인근 무안, 영광으로 이동했다. 일부 주민은 별도 시위대를 형성해 광주진입을 모색했다. 시위대는 함평읍과 학교역을 오가는 궤도버스 탈취를 시도하고 일부는 무안과 해남까지 가 경찰서 무기고를 공격했다. 대동·신광면으로 간 시위대는 대동지서와 신광지서에 들어가 '전두환 퇴진' 등 구호를 외치며 무기를 찾았다. 대동지서는 지금의 대동면사무소, 신광지서는 현 신광면사무소 자리에 있었다. 시위대는 함평∼영광을 오가며 광주 참상과 함께 군민 동참을 호소했다. 다른 지역까지 간 일부 청년들은 22일 밤 돌아와 읍사무소에 총기를 반납했다.

80년 5월 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를 이끈 박관현 열사의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생가.






● 영광군 불갑면 박관현 열사 생가 인근엔 동상·추모비

22일은 함평 장날이었다. 오전11시 기산공원(현 함평공원)에서 군민 안전과 질서 유지를 다짐하는 대회가 열렸다. 김하균 함평읍장이 주도한 대회에는 읍민 100~300명이 모여 '광주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했다. 집회는 함평읍장의 만세삼창과 함께 30분 만에 끝났다. 항쟁보다 현 상황 무마에 방점이 찍힌 사실을 안 군민들이 항의했다. 일부 시위대는 함평읍 사거리(현 농협함평군지부 앞)에 멈춰 있는 시위대 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함평과 군계를 이룬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 박관현 열사 생가도 있다. '민주학원의 새벽 기관차'로 통한 박관현(1953~1982)은 신군부 폭압에 맞섰다. 80년 4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된 그는 탁월한 지도력과 연설로 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를 이끌었다. 광주교도소에서 5·18진상 규명과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82년 10월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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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립5·18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다. 불갑테마공원에 박 열사 동상과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80년 5월 남도에서 타오른 민주화 불꽃은 80년대 내내 들불처럼 번져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5·18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원동력이자 이정표로 자리매김했다. 신군부에 의해 폭도로 매도되고 짓밟힌 남도는 민주주의 성지로 부활했다.

이돈삼 전남5·18역사해설사 전라남도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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