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우유·통조림 개발, 영유아·청소년 영양 공급·농촌계몽 헌신
기획

콩우유·통조림 개발, 영유아·청소년 영양 공급·농촌계몽 헌신

광주여성가족재단·전남매일 공동기획-길에서 만나는 광주여성 100년의 역사
⑧ 광주의 배고픔을 채우다 - 프란시스 어비슨

어비슨 가족. 고든 어비슨과 프란시스 어비슨은 두명의 딸과 한명의 아들을 뒀다. 어비슨 부부의 외아들 버드 어비슨은 한국인 2세와 결혼한 후 보병으로 한국전에 참여했다. 광주YMCA 제공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다고.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역사로 증명하기 어렵고 기록하지 않은 민족은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주여성가족재단은 근현대 역사에서 여성들의 활동상과 치적을 발굴하고 연구해 후대에 전승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광주여성길에는 숨겨져 있는 여성 인물이 많다. 프란시스 어비슨(Frances Avison) 선교사도 그 중 하나다. 인도에서 활동한 선교사 딸로 태어나 간호사가 됐으며 1919년 미국 YMCA가 한국에 파견한 파란 눈을 가진 농업박사다. 광주·전남 근대사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으며 3대에 걸쳐 한국을 사랑했던 가족사도 흥미롭다.

어비슨농업학교 학생들과 어비슨 부부. 광주YMCA 제공
● 어비슨 가족의 3대에 걸친 조선 사랑

조선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가문은 적지 않지만 그 중 프란시스 어비슨 가족은 특별하다. 조선을 위해 봉사한 가문의 경우 의료나 교육, 선교 분야에 집중한 반면 어비슨 가족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

프란시스 어비슨 시아버지인 올리버 어비슨(Oliver R. Avison)은 1893년 7월16일 아내 제니와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입국해 의료 선교에 앞장섰다. 우리나라 근대 의학 및 의학 교육 선구자로 환자 진료뿐 아니라 단 한 명의 의사 양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병원 설립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1900년 미국 카네기 홀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참가해 조선의 열악함과 의료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1만 달러를 기증한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의 “주는 사랑이 받는 사랑보다 더 기쁘다”는 말은 올리버 어비슨 선교사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고 한다.

올리버 어비슨이 한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태어난 세 번째 자식 더글러스 어비슨(Douglas Bray Avison)은 토론토 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1920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와 1920~1923년 평안선원 선교부 소속으로 의료 선교 활동을 했다. 이후 서울 선교부 소속으로 옮겨와 세브란스 의학교 교수와 병원장으로 활동했다.

프란시스 어비슨과 고든 어비슨 외아들인 버드 어비슨은 광주에서 나고 자라 성장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인 2세와 결혼했으며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보병으로 자진 참전했다. 그의 한국인 2세 부인도 미국 간호장교로 지원, 한국전에 참전해 한국군 간호부대 고문으로 간호 인력 양성에 공을 세웠다. 전쟁고아와 피난민들을 보살피는 등 헌신 봉사했다. 이런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막내딸인 진 어비슨의 어린시절 일기장이 그의 언니에 의해 발견된 뒤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일기장 내용 중 일부분이다. “가난한 시설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목자라면 어린 양을 가져왔을 텐데. 언젠가 어려운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사랑이 담긴 나의 마음을 줄 거야.”

프란시스 어비슨 선교사의 13년간 조선 봉사를 소개한 뉴욕타임즈 원본. 광주여성재단 제공
● 프란시스 어비슨 가족, 광주에 오다

프란시스 어비슨은 인도에서 활동한 선교사 딸로 태어나 오하이오주 유스터 칼리지를 졸업한 후 장로교 병원에서 간호사 수련을 쌓았다. 이때 남편 고든 어비슨은 미국 YMCA의 외국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한국 농촌 주민들에게 대중교육을 통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세 가지 ‘3R’을 실천하고자 했다. 3R은 Reading(교육), Religion(기독교 선교), Rice Cuture(쌀농사)다. 프란시스 어비슨은 1919년 미국 YMCA가 조선에 파견한 농업 박사로 입국해 광주 YMCA에 배치된 후 양림동 일대에 자리 잡고 활동을 시작했다. 광주를 중심으로 농업 전문가로서 농업 활동을 펼쳤으며 벼 증산 외 토양학, 종묘학, 우생학 등을 바탕으로 토양을 좋게 하는 법, 우량 종자 보급과 종자 고르는 법, 온실농업 목공 등을 가르쳤다. 야학을 통한 농촌지역 문명 퇴치에 힘을 쏟았으며 환경 개선을 통한 말라리아 퇴치에도 진력했다.

각처 신용협동조합과 농우회를 결성, 생활개선과 문화보급에 앞장섰다. 고든 어비슨과 함께 축구, 유도, 권투 등을 청소년들에게 장려하는 등 사회체육 보급에도 기여했다.

어비슨 농업학교 전경. 광주여성재단 제공
● 콩우유 개발, 영유아 사망률 낮추다

간호사 출신 프란시스 어비슨은 영유아 사망률을 낮추고 청소년들의 체력을 키우기 위해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는 콩우유 보급에 앞장섰다. 당시 조선에서 생산할 수 없었던 우유를 대신해 젖산으로 발효시킨 콩에 포도당을 가미한 우유를 보급했다. 이 콩우유가 당시 광주지역 출생률 생존율 50%를 70%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시스 어비슨의 지혜로운 행적에 관한 기사가 당시 뉴욕타임즈에 실려 알려지게 됐다. 어비슨 부부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에서 공부하면서 뉴욕의 유아 클락부를 방문, 조선의 영유아에게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는 등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프란시스 어비슨 선교사가 만든 개량 우유(Modified Milk)가 유아들에게 뛰어난 효능을 발휘한다는 점이 증명된 것은 뉴욕 할렘 건강센터였다. 당시 우유는 염소에서 얻는 게 거의 전부였고 염소는 다양한 종이 있어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기독병원(제중원)이 유아 클락부를 열어 스위스로부터 염소를 수입해 우유를 생산했는데 이 우유는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맞지 않았다. 이때 프란시스 어비슨은 콩을 이용해 부족한 영양을 공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남편과 상의했다. 마른콩을 물에 충분히 불려 으깨어 음료로 만들면 단백질을 함유한 영유아용 음식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것. 그러나 콩우유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수십 번의 도전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했지만 결국 젖산 양을 조절하고 포도당을 첨가하는 제조과정을 성공시켰다. 이로써 조선의 유아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콩우유가 탄생하게 됐다.

어비슨 부부의 콩우유에 착안해 지역 문화기업에서 만든 호리두유. 쥬스컴퍼니 제공
● 통조림 개발, 배고픔 해소 혁신적 기여

광주의 배고픔을 채운 건 콩우유만이 아니었다. 프란시스 어비슨은 통조림을 개발하기로 하고 농업식품학교를 열었다. 18명의 젊은 남자들이 농업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고든 어비슨이 직접 만든 장비를 통해 통조림 제조 방법을 배웠다. 세탁용 보일러와 버려진 배에서 사용했던 중기 압력계를 이용해 장작불 이상의 원하는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용접이 필요 없는 주석을 구입해 장비를 새로 제조하기도 했다. 호두와 땅콩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오래 보관하고 저장할 수 있었으며 채소죽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소화에 도움을 줬다. 조선에서 나는 다른 농작물도 먹기 좋고 영양가 높은 통조림으로 만들어 가난한 이들이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했고 판매 수입금으로 어린이 음식을 제조하는 기술에 투자하는 등 조선의 영유아와 청소년, 성인들의 배고픔을 채웠다. 이처럼 프란시스 어비슨이 개발한 식품은 식생활 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 YMCA가 농촌계몽을 위해 조선에 파견한 7개 지역 중 광주를 필두로 서울과 함흥 등 세 곳만 성공을 거뒀는데 그 중 가장 성공적인 활동으로 평가받은 곳이 광주였다. 하지만 일본에게는 눈엣가시였을 터. 결국 1939년 프란시스 어비슨 가족 일행은 강제 출국을 당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 가서도 집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한국을 그리워하다 지난 1967년 고든 어비슨 선교사가 영면했다.

조선에 있을 당시 프란시스 어비슨 남편 고든은 ‘파란 눈을 가진 쌀 박사’라고 불렸다. 이 별명이 단지 남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어비슨 부부는 농업 전문가로서 조선 농촌 계몽사업에 혁신을 이뤘다. 유아 생존율을 높이고 청소년의 영양 증진을 위해 힘썼으며 춘궁기 광주의 배고픔을 채워 주는데 앞장섰던 프란시스 어비슨의 업적이 여전히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다행히 어비슨 부부가 헌신한 YMCA 농업실습학교(일명 어비슨 농업학교) 터에 2010년 4월11일 어비슨 기념관이 설립됐다. 양림동과 광주여성길을 찾는 많은 이들이 프란시스 어비슨 가족이 광주공동체를 위해 수행한 헌신과 봉사를 기억했으면 한다.

한상규 광주여성길 역사문화해설사·광주시안보정책자문부단장·전 원광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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