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마리아 파크대학 졸업사진. 출처=독립기념관 |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3·1 만세운동 당시에 활약했던 인물들,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위인들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남성들의 이름이 나온다.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최근 몇 년 새 흥행에 성공한 몇 편의 영화 덕분에 윤희순, 남자현, 이화림 등의 이름이 회자되기도 한다. 이런 여성인물들은 대부분 무장투쟁이나 친일파 직접 처단에 나섰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3·1운동 당시 식민시대를 겪으며 실의에 빠졌던 사람들에게 용기와 감동, 그리고 교육의 필요성을 몸소 보여줬던 여성 인물은 없었을까. 나라의 독립을 되찾는데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외치고 다녔던 여성은 없었을까. 남들이 다들 꺼려할 때, 독립운동의 불길을 지피기 위해 자신의 안위와 미래를 포기하고 나선 여성은 없었을까. 바로 그 주인공들에 관한 이야기다.
![]() 수피아여학교 학생 및 교사. 사진 왼쪽 뒤에서 두번째가 김함라, 그 앞이 김마리아. 출처=유진벨기념관 |
김진상, 김근포, 김마리아. 혹시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세 개의 이름은 한 사람을 지칭한다. 김함라라는 이름은 어떤가? 김마리아와 김함라는 자매이며 3·1운동의 불길을 당긴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럼에도 광주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명이 덜 되어 우리에게 비교적 낯설게 느껴진다. 3·1 독립운동은 서울과 경기도 부근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광주에서도 일제 항거를 위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비밀리에 준비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광주 시민의 10% 이상이 참여할 정도의 대대적인 시위를 준비한 두 사람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된다.
김마리아와 김함라는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개화와 여성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은 아버지 덕에 두 자매는 신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사람에 대한 평등의식과 나라를 구하는데 누구든 나설 수 있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1906년 서울로 이주하여 안창호,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지내며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과 시국에 대해 어깨너머로 많은 걸 듣고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김마리아는 1910년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6월 큰언니 김함라가 교사로 재직중이던 광주 수피아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3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자신들이 보고 배운 것들을 토대로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정세에 대해 알려줬을 것이다.
또한 여성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과 인권에 대한 인식이 낮은 상황에서 이 두 사람이 보여준 태도야말로 그 당시 여학생들에겐 큰 본보기가 되었을 것 같다. 교사로 근무한 3년 동안 그는 수피아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키워줬다. 수피아 학생들이 3·1운동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하고 이후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항일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김마리아와 같이 일찍부터 저항의식을 고취시켜 준 교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일본 유학 시절 혼자만 한복입고 있는 김마리아. 출처=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
김마리아는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 수학 교사로 부임한다. 이후 1915년 일본의 동경여자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에 가입했는데, 김필례와 나혜석 등 쟁쟁한 인사들이 조직한 조선 여자들의 모임이었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여학생간의 친목과 지식 계발 및 국내 여성들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로 김마리아는 1917년 회장으로 선출된다.
1910년대 후반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파리강화회의 소식이 전해지자, 재일 한인유학생들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2·8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김마리아를 비롯한 여학생들도 자금을 지원하는 등 같이 행동하였다.
김마리아도 처음부터 남자유학생들과 함께 했으며, 이 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130여 원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남녀 차별 의식을 불식하지 못한 남자유학생들은 2·8 독립선언 대표자에 김마리아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는 실망스러웠지만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했고, 이후 일본경시청에 연행되어 일주일간 취조를 받았다. 김마리아는 곧 풀려났지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일본에까지 와서 선진 학문을 배우고 함께 싸우기도 했지만 그 가치와 열정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을 때 마음이 어땠을까.
조선 독립을 위해 적의 심장부에서 독립선언을 했고, 이 선언의 후속 운동을 조선에서 일으킬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는데 남자들은 다 조용했다. 이때 김마리아가 자진해서 나섰다. 한달 후면 졸업이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개인적인 안위보다 고국의 독립이었다. 일본 유학 동안 한복만을 고집했던 그가 기모노를 입었다. 종이 10여 장에 2·8 독립선언서를 베껴 옷띠(오비) 속에 숨긴 후 일본 여인처럼 변장하고, 2월 17일 동경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밀입국을 하였다. 동경에서의 독립운동 기세를 국내로 확산시키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독립투쟁의 불쏘시개로 내던지기로 한 것이다.
![]() 상해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가운데), 차경신과 함께한 김마리아(왼쪽). 출처=독립기념관 |
김마리아는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던 관계로 광주에는 학교·교회·병원 등에 많은 동지가 있었으며, 큰언니 김함라와 막내 고모 김필례도 살고 있었다. 막내 고모부(최영욱)는 광주 서석의원 의사였다. 이러한 인연을 동원하여 광주의 동지들에게 2·8 독립선언문을 전달하며 독립 거사의 준비를 당부했고, 서울과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등에 다니며 조선 독립의 필요성과 여성들에게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2·8 독립선언문이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3월 5일엔 자신의 모교인 정신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다 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출감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대한애국부인회 활동과 비밀리에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이 단체 조직원의 배신으로 또다시 체포된다. 한두 번도 아닌 체포와 투옥, 고문 등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텐데 김마리아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더 강해졌던 것 같다.
이후 상해에 망명한 김마리아를 두고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사람 10명만 있다면 한국은 이미 독립했을 것이다”라며 그의 독립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김마리아를 두고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 3.1만세운동길- 남궁혁집터(추정) |
김함라는 김마리아의 큰언니로 수피아학교 최초의 여성교사였다. 김함라는 목사 남궁혁과 결혼한 후 1908년부터 광주에 정착했다. 남궁혁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서울, 대구 등 전국으로 확산되자 3월 6일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는 비밀모임을 그의 집에서 갖는다. 남궁혁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선언문을 어떻게 인쇄할 것인지, 학생과 시민을 누가 동원할 것인지, 거사 장소는 어디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는 아마도 김함라 부부가 광주에서 신망받는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하 어두운 시기에도 여성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적의 심장부에서 용기 있고 당당하게 행동했으나 정작 대표자의 명단에는 포함될 수 없었다. 이처럼 여성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성에게 차별적인 가부장적 구조를 체감하게 되고 독립운동가이자 여성 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전개해나가게 된다. 이와 관련해 당시 황에스더의 말은 여성들의 각성을 잘 보여준다. 1919년 2월 6일 일본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며 웅변대회를 열었을 때 여학생이 소외되는 분위기에서 여성친목회 회원인 황에스더가 분연히 일어나서 한 말이다. “여러분!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겁니까? 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못합니다.”
3·1운동은 그동안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이름 없는 숱한 여성들이 나라의 독립을 되찾고자 나섰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남존여비사상과 일제의 억압이 동시에 여성들을 짓누르던 시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당당히 나섰던 김마리아와 김함라의 열정과 의지를 기억하는 일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전진하는 민주 시민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류진선 광주여성길 역사문화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