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윤기석 민주화운동 주도…군민들 합심 시위대 지원
기획

윤한봉·윤기석 민주화운동 주도…군민들 합심 시위대 지원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신군부 검거 피해 미국 밀항
광주참상 알리며 민주화 지원
전남대, 기념강의실·정원 조성
민주화운동 씨앗 뿌린 윤기석
전두환·노태우 육사 동기생
육사 자퇴 고향서 목회 활동

전남대 민주길에서 만나는 윤한봉정원. 전남대학교가 생전 윤한봉이 공부한 농업생명과학대 앞에 만들어 놓았다.
그해 오월 남도는 하나였다 5·18 전남사적지를 가다

5 강진-고교생 앞장·종교인들 뒷바라지







● 윤한봉, 현상수배에 미국으로 밀항

강진 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면 윤한봉과 윤기석이 먼저 떠오른다.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난 윤한봉(1948~2007)은 '5·18 마지막 수배자'다. 1974년 내란예비음모, 국가보안법과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전남대에서 제적됐다.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감옥에서 나와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80년 5월을 맞았다.

윤한봉의 묘.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돼 있다.






5월27일 공수부대에 의해 도청이 짓밟혔고 윤한봉은 전국에 현상수배 됐다. '김대중한테 돈을 받아 광주폭동을 일으켰다'는 이유였다. 윤한봉은 신군부 검거를 피해 미국으로 밀항했다. 미국에서 광주참상을 알리며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배가 해제되자 귀국, 국내 민주화운동에 정열을 다 바쳤다.

강진읍교회와 강진읍내 전경. 강진모란공원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윤한봉은 '합수(合水)'로 불렸다. 여러 갈래의 물을 한데 모여 흐르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지금은 5·18민주묘지에 안장돼 있다. 전남대는 생전 그가 공부한 농업생명과학대 2호관에 '합수 윤한봉 기념강의실'을 마련했다. '윤한봉 정원'도 만들어 그의 공을 기리고 있다.

강진읍교회와 강진읍내 전경. 강진모란공원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 전두환 육사 동기 윤기석 목사, 민주화운동 씨앗 뿌려

강진군 도암면 항촌리에서 태어난 윤기석 목사(1931~1997)는 육사 11기로 입학해 전두환·노태우와 같이 다니다 자퇴했다. 한국신학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윤 목사는 고향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지역 민주화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강진군지부 결성을 이끌었다. 1976년과 1979년엔 긴급조치 9호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다. 1970~1980년대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압에 굴하지 않고 맞섰다. 광주전남기독교연합회장, 엠네스티 광주지부장,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영호남교회협의회장 등을 지냈다.

강진버스터미널 전경. 버스터미널은 80년 5월 21일 버스를 타고 내려온 광주 시위대가 공수부대의 만행과 광주참상을 알린 곳이다.






80년 5월 윤기석 목사가 강진읍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공수부대의 광주참상이 강진에도 전해졌다. 21일 공수부대의 도청앞 집단발포 이후 버스 3대에 나눠 탄 광주 시위대가 강진에 내려왔다. 광주항쟁 소식을 익히 알고 있던 군민은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강진읍 남문마을에선 "터미널 앞으로 모이자"는 마을방송이 흘러나왔다. 군민들은 물론 청년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적은 현수막을 들고 버스터미널과 도서관, 강진극장 일대를 몇 바퀴 돌았다. 강진농업고등학교 학생 수백 명도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교복을 거꾸로 뒤집어 입고 계엄철폐, 민주회복, 김대중 석방 등 구호를 외쳤다. 성요셉여고 학생, 청년회의소와 기독청년회원도 함께했다.

강진 5.18민주화운동의 거점이었던 강진읍교회. 교회 앞에 5.18전남사적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jpg






윤 목사는 김영진 기독교청년전남연합회장(13~16·18대 국회의원)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윤 목사는 읍내 질서유지에 노력하며 여신도회원과 함께 시위대 식사를 챙겼다. 쌀과 반찬 등 모든 준비는 군민과 신도들이 십시일반 거들었다. 읍내 시위가 확산되자 경찰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을 피했다. 군부대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시위대는 강진경찰서에서 총기 수십 정을 손에 넣었다. 총기를 획득한 시위대는 서둘러 광주로 떠났다. 또 다른 시위대는 성전지서 무기고를 공격해 무기를 빼냈다.

강진의료원 전경. 80년 당시 도립강진병원으로, 해남 우슬재에서 군인의 총격으로 부상 당한 시위대가 입원 치료를 받은 곳이다.






성전면은 당시 영암과 강진, 해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시위 차량이 수시로 지났다. 성전의 시위는 성전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시위대는 22일 2.5톤 트럭을 타고 강진읍과 성전은 물론 마량, 작천 등지를 돌았다. 오후엔 마량면에 있던 버스 2대에 나눠타고 장흥·보성까지 오가며 시위를 벌였다.

23일엔 해남 우슬재에서 31사단 소속 군인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시민이 도립강진병원(현 강진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우슬재에선 나주 고교생 김귀환이 사망하고, 고등학생이 부상을 당했다. 강진읍교회 신도들은 강진병원으로 달려가 부상자를 뒷바라지하며 치료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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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교회, 강진 5·18민주화운동 거점

강진 5·18민주화운동은 강진읍내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거점은 기독교장로회 소속 강진읍교회였다. 윤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회 청년회원과 여신도들이 앞장섰다.

시위대는 강진읍교회에서 해준 밥을 먹고 교회와 남도장여관에서 잠을 자며 시위를 이어갔다. 강진읍교회와 옛 강진농고(현 전남생명과학고등학교)가 5·18전남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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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교회는 윤기석 목사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을 지원한 든든한 뒷배였다. 시위대는 교회를 쉼터로 활용했다. 신도들은 시위대에 먹고 마실 거리를 제공하며 응원했다. 학생 수백 명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강진농고는 강진시위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다. 5·18 이후 경찰이 학교에 찾아와 '학생시위 주동자를 잡아 삼청교육대에 입소시켜야 한다'고 협박했지만 교장 선생님이 막아냈다는 말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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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버스터미널과 군청 앞은 5월 21일 오후 버스를 타고 내려온 광주 시위대가 공수부대의 만행과 광주참상을 알린 곳이다. 남도장여관(현 남도탕)은 광주 시위대가 21~23일 머물며 쉬고 잠을 잔 곳이다. 강진읍교회 여신도들은 남도장여관까지 밥과 음료를 배달했다. 청년회의소에선 군민 대책회의가 열렸다. 청년회의소 회원들도 남도장여관에 머문 시위대와 강진병원 입원 부상자한테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이돈삼 전남5·18역사해설사, 전라남도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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