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석탄산업 시발지' 표지석과 함께 화순광업소 앞에 세워진 5.18사적지 표지석. 화순광업소는 80년 5월 시위대가 다량의 폭발물을 획득한 곳이다. |
●폭도 내몰린 이정모 유서 "살기 위해서 죽는다"
이정모는 1980년 당시 26살 청년이었다. 화순 동면에서 블록과 벽돌 찍는 일을 했다. 그해 5월 전남대학교 2학년에 다니던 늦깎이 대학생 큰형(이윤모)의 안부를 걱정하는 부모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군인들이 대학생들 다 잡아서 때리고 죽인다는데 윤모는 무탈한지….'
![]() 5.18사적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화순읍 서태리 옛 역청공장 터. 80년 5월 시위대가 폭발물을 찾아 들른 곳이다. |
정모는 그 길로 형을 찾아 광주로 갔다. 하지만 형을 만나지 못하고 시위대와 마주친다. 자연스럽게 시위대에 합류하고 시민군이 돼 옛 도청을 지켰다. 정모는 도청이 공수부대에 짓밟힌 27일 상무대로 끌려갔다. 그날부터 갖은 폭력과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그해 10월 군사법정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5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구속되기 전과 180도 달라져 있었다.
계속된 구타와 고문에 몸과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한번 눈물이 흐르면 그칠 줄 몰랐다.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폭도'로 낙인찍힌 그를 받아주는 데는 없었다. 날마다 술에 의지해 살았다.
1984년 정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 폭도가 아니다. 범죄자도 아니다. 살고 싶은데 살기 위해서 죽는다'는 유서를 남기고서.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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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너릿재서 무차별 총격 민간인 학살
이정모가 광주에서 자취생활 하는 형을 찾아 넘은 고개가 너릿재였다. 상무대 영창에서 나와 망가진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가면서 다시 넘은 길도 너릿재다. 이정모뿐 아니다. 그의 이웃과 보성·장흥사람들도 너릿재를 넘었다.
자식의 생사가 걱정된 부모는 광주에 가려고 넘었고 계엄군 총칼을 피해 광주를 빠져나간 사람들도 넘었다. 시민군은 고립된 광주 상황을 외부에 알리려고 넘었다. 시위대는 화순에서 획득한 무기와 실탄, 폭발물을 싣고 넘었다. 80년 5월 고립된 광주와 전남을 연결해 준 길이 화순 너릿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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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는 광주 외곽 봉쇄를 위해 너릿재에 공수부대를 배치해 터널을 막았다. 공수부대는 너릿재를 향해 오는 사람과 차량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야만적인 민간인 학살도 자행했다. 너릿재로 향하던 미니버스가 23일 주남마을 앞에서 11공수여단의 공격을 받았다. 버스에 탄 18명 가운데 15명이 즉사했다. 부상 당한 3명은 끌려갔다. 공수부대는 남성 부상자 2명을 사살하고 암매장했다.
![]() 광산종사자 추모비. 화순탄광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진 광부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다. 화순광업소 앞 언덕에 세워져 있다. |
●도청앞 광장 분수대, 동복댐 물 공급 기념 조성
너릿재 옛길은 산허리로 난 길을 따라 고개를 넘는다. 길이 험했다. 도적이 득시글댔다. 도적떼에 죽임을 당해 널판에 실려 느릿느릿 내려온 시신이 많았다고 전한다.
너릿재의 아픔은 광복 이후에도 계속됐다. 1946년 8월 광주에서 열릴 광복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려는 화순탄광 광부들이 미군과 경찰의 총격을 받았다. 1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된 사람들이, 9월엔 광주형무소 재소자들이 너릿재에서 죽임을 당했다. 수많은 널이 넘나들었다고 '널재'로도 불렸다.
![]() 너릿재 옛길의 봄. 너릿재는 80년 5월 공수부대에 의해 고립된 광주와 광주밖 전남을 연결해 준 고개다. |
너릿재에 터널이 뚫린 건 1971년이다. 화순군민보다 광주시민을 위한 터널이었다. 동복댐 물을 끌어오는 송수관을 묻기 위해서였다. 동복댐이 들어서고 너릿재 터널을 통해 동복댐 물이 공급되면서 광주시 물 부족 문제가 해결됐다.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세워진 분수대는 동복댐 물 공급을 기념한 조형물이다.
도청 앞 분수대는 80년 5월 민족·민주화 대성회의 연단으로 쓰였다. 5·18민주화운동의 중심무대도 이곳 광장이었다. 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열사의 노제, 6월항쟁과 박근혜·윤석열 파면 요구 집회도 분수대를 배경으로 열렸다.
![]() 너릿재공원에 세워진 5.18사적지 표지석. 소아르미술관으로 가는 길목, 도로변이다. |
●화순 청년들, 탈취무기 광주 시민군에 전달
너릿재공원에 5·18사적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김준태 시인의 시를 새긴 기념조형물도 나란히 세워졌다. 너릿재와 함께 화순군청과 화순경찰서 일원, 화순광업소도 5·18 전남사적지로 지정됐다.
80년 당시 광주와 같은 생활권인 화순엔 광주 시위와 공수부대의 만행이 바로 전해졌다. 화순읍에 사는 일부 청년들은 광주 시위에 참여했다. 5월 21일 광주 시위대를 태운 버스가 화순군청 앞에 도착했다.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해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며 군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전두환 처단' '김대중 석방' 등 구호도 외쳤다. 화순군민은 박수로 호응하며 김밥과 음료 등을 건네며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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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시위대는 화순경찰서와 경찰관서를 공격하며 무기 획득을 시도했다. 시위대는 화순경찰서 역전파출소와 동면지서에서 총기 700여정, 실탄 1600여발을 빼냈다. 화순경찰서에선 시위대에 무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예비군들에게 총기를 나눴다가 회수하기도 했다. 경찰은 회수한 무기를 동구리 만연저수지 인근 야산에 숨겼다. 화순청년들은 동구리에 감춘 무기를 찾아내 광주시민군에 전달했다. 총기 반납을 거부한 일부 주민은 사평·이서에서 송광면까지 오가며 차량 시위를 벌였다.
화순경찰서 사거리에서도 차량 시위가 계속됐다. 일부 군민은 31사단 714대대를 찾아 총기와 실탄을 요구하기도 했다. 만연산자락 유천리에 있던 714대대는 지금 주택단지로 변했다.
●화순광업소, 시민군 든든한 '뒷배'역할
광주참상은 화순시외버스터미널과 화순역을 통해 전해졌다. 18일 이전 횃불시위도, 18일 이후 소문으로 떠돌던 공수부대의 만행도 버스와 기차를 타고 온 주민에 의해 확인됐다. 광주에서 온 차량 시위대가 터미널에서 경찰관서 위치를 물었다. 주민 조 아무개 씨가 친절히 안내하고 주민들은 빵과 음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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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외버스터미널은 지금 외곽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는 군내버스정류장으로 쓰이고 있다. 화순탄광 무연탄 수송을 위한 화순선 출발점이기도 한 화순역은 2003년 현대식으로 디자인 한 새 역사로 단장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순광업소는 시민군이 다이너마이트를 획득한 곳이다. 21일 광주에서 내려온 차량 시위대가 연달아 화순광업소를 찾아 폭약과 뇌관을 요구했다. 광업소 창고와 지하엔 석탄을 캐는 데 필요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도화선 등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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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광업소 측 완강한 거부로 시위대는 발길을 돌렸다. 시위대는 폭발물을 찾아 역청공장에도 들렀다. 화순읍 서태리에 있던 역청공장은 도로포장 등에 쓸 역청(瀝靑) 생산을 위한 채석장 발파용 다이너마이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경찰은 역전파출소 중요 문서를 역청공장에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
시위대가 폭약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화순청년 신 아무개씨 등이 화순광업소에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빼내 전남도청으로 옮겼다. 도청으로 옮겨진 폭약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시민군의 무기가 됐다. 공수부대는 다량의 폭발물을 의식해 도청에 쉽게 쳐들어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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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의 든든한 뒷배가 돼 준 화순광업소는 우리나라 석탄산업 출발지다. 박현경이 광업권을 처음 얻고 1908년 석탄 채취를 시작했다. 100년 넘게 채탄하는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진 광부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가 광업소 앞 언덕에 세워져 있다. 여순사건 때 숨진 경비군인과 마을주민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도 서 있다.
<> 이돈삼 전남5·18역사해설사, 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