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피아여학교 수피아홀. 1911년 수피아여학교에 건립한 3층의 회색 벽돌 건물. 등록문화재 제158호. |
김필례(金弼禮·1891~1983), 그는 말보다 실천으로 시대를 이끈 인물이었다.
백단심길에서 수피아여학교 담장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김필례가 1920년~1947년 재직하며 가르친 자리. 세월이 흐르고 건물은 바뀌었지만 그의 교육 정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는 말한다. “딸들도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배워야 한다. 그래야 남자들에게만 의존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여성에게 삶의 주도권을 돌려주는 선언이었다. 그는 단지 한 시대의 교육자가 아니었다. 광주 여성의 길잡이이자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영원한 스승이었다.
광주여성길을 따라 걸으면 단지 과거의 인물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를 묻는 여정에 이른다. 그 길 위에서 김필례 선생님의 흔적을 마주할 때마다 그의 실천과 결단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을 곱씹는다.
![]() YWCA 초창기 자원 활동가. 1922년 3월 27일, 4월 20일, 5월 4일 세차례에 걸쳐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에 앞장서서 활동했던 초창기 YWCA 자원 활동가들. 왼쪽 아래 두 번째부터 홍에스더, 김필례, 정신학교의 겐소, 호주선교사 맬라렌, 유각경, 김활란, 황에스더. 출처=광주YWCA 홈페이지 |
김필례는 1891년 황해도 장연에서 전통적으로 만석꾼에 여유가 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여 개화한 집안이었다. 우리나라 최초 교회 소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소래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언니 김순애와 조카 김미렴, 김마리아 등과 함께 색동 바지저고리 남복 차림으로 학교를 다니며 교육 받았다. 어린시절 개방적인 가정환경과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그는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간다. 근대교육을 접하면서 전통적 여성 삶보다 새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 있는 독립적 삶의 가치를 알게 됐고 나라와 민족에 대한 생각도 함께 성장한다.
1903년 서울 연동여학교(이후 정신여학교로 교명변경)에 진학해 본격 교육을 받는다. 연동여학교는 조선 여성들에게 신앙과 지식을 가르치는 배움터였으며 기독교 신앙을 중심에 둔 학교였다. 이곳에서 성경공부는 물론 역사, 음악, 침공 등 교과를 이수하며 지성과 신앙을 함께 다져갔다. 연동여학교는 당시 여성 교육 최전선에 있었다.
두 번이나 월반할 만큼 공부를 잘했고 열심이어서 상으로 풍금을 배우게 됐다. 풍금이 기초가 돼 일본 동경여자학원 재학시절 학교 승인 하에 영화음악전문학교를 동시에 다닐 수 있었다. 연동여학교 최초 졸업생 중 한명이다. 졸업 후 연동여학교 수학교사로 남았다. 열일곱이라는 나이로 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부담이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 실력은 인정했지만 어린 필례를 제대로 선생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교사보다 공부가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집안 형편이 유학을 떠나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기숙사에서 밤마다 울면서 생각하니 언니 김순애와 혼담이 오간 적이 있던 학부 학무국창 윤치오 형수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에게 부탁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필순이 치료 담당 의사였다. 오빠에게 부탁해 윤치오에게 부탁해달라 하고 기숙사에서 밤마다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동경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더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가난하고 불쌍한 동포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배워와 전해 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이기서 ‘교육의 길 신앙의 길 김필례 그 사랑과 실천’ p.57)
나라와 동포를 위한 도구로 쓰이기 위한 기도였다.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 윤치오에게 부탁한 지 1년 만에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됐다는 소식이 왔다. 스스로 삶을 위해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삶의 자세가 그를 유학의 길로 인도한 것. 정신여학교에서 시간은 김필례에게 신앙의 확고함과 민족의식, 여성의 자립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심어줬다. 이 시절 경험은 이후 그가 교육과 여성운동에 헌신하는 원동력이 됐고 그의 애국정신은 그 중심에 자리 잡게 됐다.
![]() 김필례. 출처=광주YWCA 홈페이지 |
● 일본 유학과 조선 YWCA 창립의 기틀
1908년 조선 정부가 파견한 여성 최초 국비유학생 김필례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타국의 삶은 외롭고 쉽지 않았지만 조선 대표 존재라는 사실을 늘 의식했다.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점을 명심했다. 나 자신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 배후에 이천만 동포가 있으니 나 혼자만의 잘못이 조국의 오점이 될까 얼마나 저어했는지 몰랐다.” (‘김필례 그를 읽고 기억하다’ p.53)
조선 여성의 지성과 품위를 드러내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을 다듬었다. 그곳에서 만난 일본 여성들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YWCA 활동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줬다. 조선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비교하며 “이러한 조직이 조선 여성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귀국 후 이 사명을 실천에 옮긴다. 1922년 김활란과 함께 조선YWCA를 창립한다. 하지만 일제는 독립된 조선 YWCA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YWCA 대표에게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폭로하겠다”고 경고하며 정면으로 맞섰다. 그 결과 조선 YWCA가 독립조직으로 설립될 수 있었다. 이는 그녀의 기지와 용기가 빚어낸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김필례는 민족의 독립과 여성의 해방을 동시에 꿈꾸던 집안에서 자랐다. 오빠 김필순은 우리나라 1호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활약했고 언니 김순애는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형부 김규식은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지냈으며 조카 김마리아와 김함라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가족 전체가 조국을 위한 길을 걸었다. 그는 “배운 사람은 민족과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의식을 어릴 적부터 몸소 느끼며 성장했다. 오빠 김필순의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였고 언니 김순애는 일제 감시를 받으면서도 여성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이런 가족의 삶은 그에게도 내려오게 된 가문의 뿌리이자 유산이었다.
![]() 책 ‘쉼없는 열정’ 표지 |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필례는 1918년 의사 최영욱과 결혼한 후 광주 양림동으로 이주한다. 결혼 후 치치하얼에서 오빠 필순의 독립이상촌 건설을 돕다가 넉 달 만에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광주로 돌아온다. 광주에서 신앙과 가정의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흥학관에서 야학을 열어 한글 교육과 실용지식 전파에 앞장섰다. 당시 여성교육을 절감했고 여성 교육을 위해 교육 받는 여성 본인의 역할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배운 만큼 달라야 하고 믿는 만큼 달라야 한다”는 말을 신조처럼 되풀이했기에 자신이 솔선수범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야학에 참여하는 학생 수는 보통 100명 안팎, 많게는 300명까지 모여 공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학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가정의 딸, 유학생 남편을 둔 새댁, 부잣집 며느리, 이혼당한 여성들도 있었다. 당시 과년한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야학이 성할 수 있었던 것은 김필례의 인물됨이 작용했다고 본다. 김필례가 까다로운 시어머니 밑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시어머니 봉양을 잘하고 직장생활도 잘하는 점이 소문이 나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신식 며느리라면 안심하고 맡기겠다”, “너도 가서 그 사람처럼 돼 오너라”고 야학에 보내주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낮에는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학생들과 소통을 이어갔고 밤에는 흥학관 불을 밝히며 광주 여성들에게 자립정신과 사회참여의식을 심어줬다. 부인조력회를 조직해 여성 교육, 복지, 의료, 구호 사업에 전방위적으로 나섰다. 그의 활동은 교실을 넘어 지역사회를 일깨우는 일이었고 광주 YWCA 조직화, 농촌 계몽활동, 노동자 구호 등으로 이어졌다.
여성의 자각과 민족 자주를 연결 지으며 여성운동을 민족운동 일환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여성이 깨이면 민족이 일어선다”는 신념을 이어갔다. 독립운동에도 함께 했다. 1919년 2월 중순 일본여자로 변장한 조카 김마리아가 광주로 온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중이었고 동경 유학생 중심으로 2·8 독립선언이 있은 직후였다. 김마리아는 졸업을 앞뒀지만 2·8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가져오기 위해 스스로 나섰다. 그는 만삭의 몸으로 김마리아가 가져온 2·8 독립선언서를 집에서 밤새 복사해 마리아가 임무를 돕는다.(후에 이곳이 서석의원이 된다. 서석의원 지하에서 2·8독립선언서를 복사했다고 알려지게 된다.)
![]() 1908년 9월 05일 황성신문의 ‘여학도유학(女學徒遊學)’ 기사. 출처=국립중앙도서간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 신사참배 거부·신앙인의 저항…해방 후 교육의 길
1938년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교감 김필례는 거부하며 수피아여학교를 자진 폐교한다. “나는 하나님 외 어떤 신에게도 절할 수 없다.” 그의 말은 신앙인의 저항이자 교육자의 선언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로 열닷새간 수감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 수피아여학교 재건을 하게 되는데 그때 졸업생 중 조아라가 있었다. 조아라는 김필례가 수피아여학교에 재직할 때 만난 제자인데 후에 ‘광주의 어머니’라 불리면서 여성, 인권, 사회복지 운동가로 평생 광주 YWCA와 함께하며 김필례의 정신을 실천했다. 이는 김필례가 단지 한 사람을 가르친 게 아니라 시대를 이을 여성 리더를 길러낸 교육자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교육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바꿨고 그 영향은 수많은 여성과 시민들에 퍼져나갔다.
광복 후 김필례는 서울여자대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YWCA 활동을 이어갔다. 정신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신앙과 교육의 조화를 이루는 리더로 자리매김 했다. 6·25 전쟁 중 피난지에서 교육을 멈추지 않았고 “믿는 대로 살아야 세상이 변한다”고 제자들에게 말했다.(‘쉼 없는 열정’)
광주에서 김필례의 삶은 교육 현장에서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교과서에 갇힌 교육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권리와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게 하는 실천적 교육이었다. “학생들이 교문을 나선 이후 삶을 생각하며 가르쳤다. 교실은 출발점일 뿐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광주, 수피아여학교는 지식 전달 공간을 넘어 여성 시민 양성소였다.
그의 교육철학은 학생 내면에 씨앗처럼 뿌려졌고 광주 YWCA, 기독교 여성단체, 사회봉사 활동 등으로 자라났다. 여성 지도자 양성, 청년 여성 자립 운동, 사회 정의실현 등 시대의 요구에 반응하며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광주에서 삶은 김필례 자신의 사명과 철학을 구체화한 시간이었다. 광주 여성운동 초석이 됐으며 후속 세대 길잡이가 됐다.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김필례의 교육을 통해 길러졌고 오늘의 광주 여성운동 역시 그 유산 위에 서 있다.
● 오늘, 다시 묻는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해설사로서 두홉길을 걸을 때마다, 백단심길에서 질문을 받고 홍단심길에서 응답한다. 그 길 끝에서 김필례 선생의 숨결과 마주한다. 그는 언제나 조용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대는 지금, 어떤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김필례 선생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다. 그는 지금도 광주의 바람 속을 걷고 있고 누군가 손을 잡아 일으키고 있으며 광주와 양림동, 해설사 발길이 닿는 길목마다 살아 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광주여성길은 단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묻는 질문이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길을 이어가고 있는가?”
연아름 광주여성길 역사문화해설사(5·18기념재단&ACC 오월안내해설사, 광주시동구문화관광재단 관광헬퍼 동구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