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5·18 폭압 ‘고결한 저항’으로 맞선 ‘광주의 어머니’
기획

일제와 5·18 폭압 ‘고결한 저항’으로 맞선 ‘광주의 어머니’

광주여성가족재단·전남매일 공동기획-길에서 만나는 광주여성 100년의 역사
⑦ 조아라-근대적 여성 리더의 탄생
사회복지활동 통해 한국 사회 발전 기여
시대의 이정표·근대적 여성 리더십 상징
독립·사회복지·민주화 향한 투쟁 행진

조아라 선생
광주시 남구 양림동 역사마을 오웬기념각에서 호랑가시나무 언덕길을 오르는 골목길 안쪽. 소박하고 낮은 지상 2층 건물의 작은 기념관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소심당 조아라 기념관. 이곳은 조아라 선생이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살던 곳이자 남도의 근현대사를 꿰뚫는 여성운동 산실이다. 조아라 선생은 일제강점기 질곡 속에서 독립을 외쳤고 해방 이후 사회복지와 민주화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삶은 시대를 관통한 투쟁의 연속이었고 동시에 따뜻한 손길을 건넨 삶의 여정이었다.



조아라 기념관은 조아라 선생이 생전 기거했던 ‘계명여사’ 건물로 광주YWCA에 기증돼 2015년 광주의 제1호 여성운동가 소심당 조아라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 그의 신념, 지역의 정신·시대 이정표 귀감

조아라 선생의 호 ‘소심당(素心堂)’은 호남 남종화 거장 허백련 화백이 지어줬다. ‘티 없이 맑은 마음’ 즉 세속에 물들지 않고 청렴하다는 뜻이 담긴 그 이름은 조아라 선생 생애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조아라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조용한 공간이 한 사람의 굳건한 의지를 말없이 들려준다. 낡은 한복, 오래된 찻잔, 모서리가 닳은 성경책…. 그의 손때 묻은 소지품들은 역사의 증언이자 우리 시대가 잊지 말아야 할 가치의 흔적이다.

조아라 선생이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길 위엔 분명히 누군가를 위한 ‘등불’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여성의 권리, 복지의 기틀에는 ‘조아라’라는 이름이 깊게 새겨져 있다.

1912년 3월 28일 나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조아라 선생은 3남 3녀 중 둘째로 광주 양림동 수피아여학교에 입학(1923년)하며 민족과 여성에 대한 자각을 키워갔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 여성 최초 YWCA 창립자이자 교육자였던 김필례 선생은 조아라 선생에게 ‘여성’도 ‘민족’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걸 가르쳤다.

그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배움’만이 아닌 ‘실천’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931년 졸업 후 서서평 선교사가 세운 이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저 교단 앞에 머물지 않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을 뒤흔들던 그 시기 ‘백청단 (은지환) 사건’과 관련돼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감옥에 수감된다. 그가 선택한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출옥 후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일제 강요에 따른 창씨개명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불복종이 아닌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결한 저항’이었다. 한 사람의 신념이 한 지역의 정신이 됐으며 결국 한 시대의 이정표가 됐다.

평양평화토론회. 조아라 선생이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제3차 평양토론회에 참석 당시 여성계 지도자들과 함께한 모습.


● 해방 후 여성운동·사회복지 사업 선구자

1945년 해방의 기쁨이 온 나라를 뒤덮었을 때 조아라 선생은 광주에서 다시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라를 되찾은 그날부터 그는 ‘여성의 자리’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독립의 기쁨 뒤에도 여성의 권리는 여전히 그림자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 조아라 선생은‘건국준비광주부인회’를 조직하며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본격적으로 이끌었다. 이는 광주지역 여성운동의 본격 출발점이 됐으며 곧바로 광주YWCA와 수피아여고 재건을 추진했다.

이후 광주YWCA에서 총무, 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하며 지역 여성운동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 “여성의 권리는 말로만 외칠 게 아니라 제도 안으로 끌어와야 합니다”라던 그의 말처럼 그 시절 수많은 여성 단체들이 설립되고 실질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6·25 전쟁 직후 수많은 전쟁 고아들이 길거리를 떠도는 모습을 외면하지 못한 조아라 선생은‘성빈여사’(1952년)를 설립했다. 교육 기회를 잃은 여성들과 청소년을 위해 ‘호남여숙’(1952년), ‘별빛학원’(1962~1972년)을 운영하며 실질적인 복지와 교육의 현장을 만들어냈다. 1961년 성매매 여성들의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설립한 ‘계명여성복지관’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냉대받던 여성들에게 직업교육과 정서회복의 공간을 마련해 준 이곳은 많은 이들에게 ‘두 번째 삶’을 열어줬다. 1966년 광주 최초 ‘가정법률상담소’를 개설해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가정을 잃은 여성들이 다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도록 법적·경제적 권리를 지원했다. 이처럼 조아라 선생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필요한 일을 찾아 실천하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별빛학원 제14회 졸업식. 가정형편이 어려워 교육받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해 별빛학원을 운영하고 학생들이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 “5·18, 만든사람 따로 있고 우린 피해자”

광주가 피로 물들었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조아라 선생은 69세의 고령에도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며 부상자와 구속자 가족을 돌봤다. 이로 인해 ‘내란음모죄’로 체포돼 송정경찰서에서 4개월, 통합병원에서 1개월 등 6개월간 수감됐다가 구속 중 군사재판에서 징역 6년을 구형 받았다.

그의 법정 최후진술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5·18은 만들어낸 사람 따로 있고 우리는 피해자일 뿐이다. 하나님과 역사는 준엄한 심판으로 어느 때인가 그 진실을 밝혀 주실 것이다.”

항소심에서도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5·18은 틀림없이 어떤 목적을 위한 계획된 사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계획적인 방화사건이나 다름없는데 어째 이 나라의 법은 방화범을 찾지 않고 불을 끄러 간 선의의 협조자를 죄인 취급하는 법정이 열리고 있는지, 상식에 어긋나기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국군이 잔악무도하게 죄없는 시민을 살상하고 짓밟는 그 일을 수습하러 나온 수습위원일 뿐인데 어찌 내란음모죄와 내란음모 수행임무죄가 된다는 말입니까. 이 법정을 담당하신 재판부에 나의 간곡한 호소를 전하려 합니다. 나는 일찍 민족 비운의 역사 속에 태어나 잘 살았든 못 살았든 이만큼 나이 먹고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 법정에 앉아 있는 저 씩씩한 젊은 학생들은 학교로 직장으로, 교수님들은 교단으로, 성직자·변호사는 또 그들의 본직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길 간곡히 호소합니다.”(‘낮은 땅의 어머니’ 중에서)

그날 이후 사람들은 조아라 선생을 ‘광주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고문과 수감, 굴욕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신념은 그를 한 명의 활동가에서 ‘시대의 증언자’로 만들었다. 출감 후에도 민주화와 인권 보호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조아라 선생은 92세의 나이로 2003년 7월 8일 소천할 때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 곁에서 평생을 헌신했다. 그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거행됐으며 장례 행렬은 국립 5·18 민주묘지로 향했다. 정부는 고인의 민주화에 대한 공로를 높이 평가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학생독립운동기념관 참배실. 광주학생운동 당시 은지환 사건(1931년)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조아라 선생 사진이 참배실 오른쪽 제일 아래에 위치해있다.
호남여숙 제1회 졸업식. 조아라 선생은 성빈여사에 들어온 아이들중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을 위해 3년제 야간중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다.


● 마지막 소원 “하나되는 남북통일 염원’

조아라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남북통일이었다. 1992년 한국 여성 대표로 평양토론회에 참석해 남북 여성 간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였으며, 생전에 “이 땅의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는 뜻을 남겼다. 여성운동, 민주화운동, 사회복지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한 조아라 선생.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며 근대적 여성 리더십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을 것으로 믿는다.

박민정 광주여성가족재단 역사해설사(광주여성가족재단 역사해설사·광주문화관광해설사·광주시립미술관 도슨트, 전 광주디자인비엔날레·광주비엔날레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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