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시절 독립자금 전달…산모건강 위해 의사된 독립운동가
기획

유학시절 독립자금 전달…산모건강 위해 의사된 독립운동가

광주여성가족재단·전남매일 공동기획-길에서 만나는 광주여성 100년의 역사
⑩현덕신-겨레의 아픈 상처 어루만진 호남 최초 여의사
남편 고향서 현덕신병원 개원
현재 화니백화점 자리서 운영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진학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기념 사진(1921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흰 한복이 현덕신. 출처=이동순 ‘현덕신:조선의 여성을 위해 의사가 된 독립운동가’
광주 충장로. 흔한 일상인 듯 지나치는 길목 곳곳에는 오랜 세월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다. 오늘 나의 평범한 하루가 오기까지 결코 평탄치 않은 시대를 끝끝내 이겨온 이들이 걸어온 길이다. 그곳엔 평소에 오며 가며 자주 방문하는 한 편의점이 있다.

1999년까지 그 시절 광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화니백화점이 있던 자리다. 더 한참 전 1927년 이곳에 광주 최초 부인과 현덕신 병원이 시작됐다.

그가 최초 호남 여성 의사가 되기까지, 또 이 땅에서 소명을 다할 때까지 강제 점령당한 망국의 시대라는 어둠에 굴하지 않고 조선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간 그 여정을 가슴 속에 기억하고 회상 해본다.

조선총독부의원의 유일한 여의사 현덕신 (1922년 추정), 출처=이동순 ‘현덕신 : 조선의 여성을 위해 의사가 된 독립운동가’


● 평양 진명학교 교사로 여학생 근대 교육

현덕신은 1896년 1월 12일 평남 용강에서 연주 현씨 현종국과 김유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오빠 현석칠은 집안 내력대로 한학을 공부하던 중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가 나눠준 성서를 읽고 감화를 받아 1909년 전도사가 됐다. 1911년 서울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발령나며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 했다.

이후 현덕신은 미국 남감리교단에서 세운 최초 근대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신앙을 깊이 하며 기독교의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배워갔다. 그렇게 여성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조선 여성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것이란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이화학당 졸업 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도해 설립한 평양 진명학교 교사가 됐다. 여학생들에게 근대 교육을 가르치며 가부장제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성들을 성장시켜 나갔다.



남편 최원순과 결혼식 (1923년 6월 16일). 출처=국가보훈처
● 로제타홀 권유에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진학

교사에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고 있던 현덕신은 그의 인생 가장 큰 도전과 결단을 해야 하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조선의 산모들이 출산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의료선교사였던 로제타홀이 서양 의술을 가진 조선 여성 의료인 양성의 필요성을 느꼈고 현덕신에게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진학을 권했다. 적성에 맞던 교사 일을 그만두고 낯선 땅에서 혈혈단신 공부한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고민 끝에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어떻게 하면 조선여자들을 위하야 도움이 될까 조선 사회에 유익한 인물이 될까하고 생각하다가 교육계로 가는 것 보다도 병이 들어서 죽을지언정 남자에게 뵈이지 아니하려고 하는 조선여자들을 위하야 봉사적 생활을 하는 것이 거룩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성격에 맞는 방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의사가 되기로 결정하였든 것인데….”(현덕신 ‘女醫師(여의사)가 되기까지’, 고심기 ‘신가정’ 3권 11호 중)

그렇게 평양에서 서울역으로, 부산항으로 조선을 떠나 일본 시모노세키항으로, 마침내 동경에 닿으며 조선을 강제 점령한 나라 일본 한가운데서 밤낮 공부에 전념했고 당당히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유학을 갔을 때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의 친목 단체로 발족해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남학생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자 유학생들은 1915년 4월 재일본동경여자유학생 친목회를 결성했고 1917년 10월 17일 임시 총회를 열어 회장 김마리아, 총무 나혜석, 서기 정자영, 부서기 김충의, 회계 현덕신을 선출했다.

이들은 조선 여성의 지위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반영한 조직이었으며 1919년 2·8 독립선언에서도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이무영의 ‘2·8 전후’에서는 김마리아가 조선청년독립단을 찾아가 현덕신이 가난에 배고픔을 참아가며 학업에 임하면서도 모은 돈 40원을 비밀리에 대신 전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독립선언으로 구금되며 이후 계속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여자유학생항흥회’를 조직하고 ‘고학생동우회’ 임원으로 함께하는 등 유학 생활 내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조선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이동순 저서 ‘현덕신:조선의 여성을 위해 의사가 된 독립운동가’ 표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921년 동경의전 졸업 조선 세번째 여의사 등극

마침내 현덕신은 1921년 11월 22일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세 번째 조선 여의사가 됐다. 그리웠던 조국에 큰 뜻과 꿈을 품고 돌아왔지만 당장 의료인으로서 거처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충분한 의술 경험의 필요성을 느꼈고 스스로 일할 곳을 찾아 나섰다.

지금처럼 정해진 수련 과정이 정해진 것도 아니던 상황에서 의사로서 길을 선구적으로 개척해 나간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그는 전화번호부에 나온 조선총독부의원 원장에 연락을 했고 2년간 내과를 거쳐 산부인과에 근무했다. 100명의 의사와 간호부, 직원 중 여성은 현덕신 혼자였다. 1923년 로제타홀은 현덕신을 조선 최초 여성전문병원 보구녀관에서 시작된 동대문부인병원으로 불렀다. 그곳에서 5년간 의사로서 내공을 쌓아갔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는 일이 없이 바쁘게 진료와 활동해 나가던 그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선택한 일은 조선 사회를 또 한 번 들썩이게 했다. 바로 단발머리. 지금 들으면 아무도 관심 없을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사회적 시선과 관습에 구애되지 않고 당당히 조선사회를 위한 뜻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라준 남편 최원순이 있었다. 동경에서 2·8 독립운동을 함께 하며 알게 된 광주 출신 동아일보 정치부장 최원순과 1923년 6월16일 종로 중앙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조선여자 의학계에 이름이 자자한 현덕신 여사는 육신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할 뿐 아니라 정신으로 불구자가 되어 도탄 중에 신음하는 조선여자사회를 이하여 또한 혈성을 다하는 것이다.”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을 다 치료-여자기독청년회장 현덕신’, 조선일보 1924년 11월 26일자)

‘첫길에 앞장선 이들’이라는 조선일보 기획 기사에 네 번째로 소개된 현덕신을 보면 치료 뿐 아니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과 강연을 했고 공공의료 필요성과 공창 폐지를 주장하는 등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 갔다. 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 회장이 되고 태화여자관에 사무실을 얻어 사업을 추진해 나간 정황을 보면 그의 실무적인 역량과 열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혁신적인 면모는 한둘이 아니었다. 여성들의 성교육 필요성을 주장했다. 성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죄악시 하던 사회에서 이를 공론화한 것. 성병을 예방하고 어린 여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현덕신. 출처=국가보훈처


● 광주에 현덕신병원 개원 여성·아동 진료

1927년 남편 최원순의 건강 악화로 고향 광주로 이주했다. 광주지방 인사들의 열열한 요청으로 광주군 수기옥정 350번지에 ‘현덕신병원’을 개원했다. 지극정성으로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진료하며 광주에 정착했다.

근우회 지회를 설립하고 1930~1932년 광주 YWCA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계속해 갔다. 그런 그의 삶을 언제나 지지하며 평등하게 동행해 주던 남편 최원순은 1936년 7월6일 그와 아들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별로 슬퍼하기도 버거운 시기에 일제의 만행은 참혹했다. 그러나 그의 선행은 멈추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한 당시 수피아여고 교장이던 유화례 선교사가 추방됐다. 그가 돌보던 아이, 한센병으로 부모를 잃은 진주를 본국에 데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덕신은 선뜻 진주를 호적에 친딸로 올리며 입양했고 독립 때까지 보살폈다.

광복 이후 1949년 산부인과와 소아과 의사로 일하며 유아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고 병원 안에 유치원을 설립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보고 사회에 공헌한 그는 1963년 7월5일 아름답고 치열했던 삶을 남기고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머리 손질할 시간도 아까워 한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여성과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살았던 현덕신은 대의적으로도 일상 속에서도 시대에 필요한 가치를 실현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지선 광주여성길 역사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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