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교육·한센병 돌봄… '광주 공동체 결속' 헌신한 '정의의 사도'
기획

여성교육·한센병 돌봄… '광주 공동체 결속' 헌신한 '정의의 사도'

광주여성가족재단·전남매일 공동기획-길에서 만나는 광주여성 100년의 역사
⑥‘조선 여성 교육 선구자’ 유화례 선교사 빛과 희생

유화례 선교사
광주 근대여성교육 시작은 여성 선교사들의 열정에 힘입은 바 크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유화례 선교사다. 수피아 여학교에서 조선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며 교육과 신앙의 가치를 심었다. 신사참배 거부와 한센병 환자 돌봄, 광주공동체를 위한 헌신은 지역 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두홉길에서 만나는 유화례. 그의 삶을 따라가본다.



●광주에 심어진 작은 씨앗 유화례 선교사

유화례 선교사(Florence Elizabeth Root·1893~1995)는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나 스미스 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수학 교사와 직장 근무를 거쳐 선교사 길을 걷는다. 1927년 34세때 한국으로 온 그는 음악과 영어를 가르치며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여성 교육이 어려웠던 시대에 광주에서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며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 선구자였다

그의 한국명은 영어 이름에서 유래된 뜻깊은 이름이었다. ‘Root’는 ‘뿌리’를 의미해 ‘유(柳)’로, ‘Florence’는 ‘꽃’을 뜻해 ‘화(華)’로, 여성 이름에 흔히 쓰이는 ‘례(禮)’를 더해 ‘유화례(柳華禮)’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탄생했다. 이 이름은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이름이 아닌 광주에서 여성 교육의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희망을 심어주는 중요한 상징이 됐다. 교육을 통해 여성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고 사회에서 역할을 넓힐 수 있도록 도왔다.

유화례기념도서관. 1974년 10월 26일 준공. 출처=수피아100년사·수피아여고홈페이지
신사참배 거부후 수피아 여학교 전경. 출처=수피아100년사·수피아여고 홈페이지
●유화례 선교사의 교육 신념

1934년 유화례 선교사는 수피아 여학교 5대 교장으로 취임하며 교육에 대한 비전을 확고히 했다. 당시 조선에서 여성 교육은 많은 사회적 장벽과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유 선교사는 단 한 명의 여학생이라도 배움을 원한다면 반드시 가르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에게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었다.

수피아 여학교에서 학문교육을 넘어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정규 교과목인 국어, 수학, 영어, 과학뿐 아니라 음악과 가정학, 윤리 교육 등을 강화해 학생들이 실질적인 삶의 기술과 도덕적 가치관을 함께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여성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교육과 직업 훈련도 병행했다. 재봉과 가사 교육을 통해 실생활에 필요한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했다.

유 선교사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그는 학문적 성취뿐 아니라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을 장려하며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줬다. 교육이 개인을 넘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믿었으며 조선의 여학생들이 지식뿐 아니라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돕는데 중점을 뒀다. 이러한 신념은 조선 여성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고 그들의 삶과 사회적 역할을 재정의하는 데 기여했다.

한센병 비감자 입양아 진주를 안고 있는 유화례 선교사. 출처=수피아100년사·수피아여고 홈페이지
●신사참배 거부와 수피아 여학교의 정신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조선의 기독교 학교들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압박을 강화했다. 신사참배는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의식으로 이는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행위였다. 당시 일제는 신사참배를 단순한 국가 의식이라고 주장하며 기독교 학교들에도 이를 따를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키려 했던 많은 선교사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강하게 반대했다.

유 선교사 역시 신사참배를 강요받았지만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신사참배 허용은 수피아 여학교 기독교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수피아 여학교 교사들과 학생들 또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제는 학교 운영에 대한 압력을 가중했고 결국 1937년 수피아 여학교는 강제 폐교되고 말았다.

수피아 여학교 폐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문을 닫았다는 의미를 넘어 신앙과 교육의 자유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희생을 의미했다. 폐교 조처가 내려지자 많은 학생은 배움터를 잃었고 교사들은 강단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학교가 문을 닫아도 교육의 정신과 신앙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학생들은 공식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지만 교사들은 비밀리에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부 학생들은 교회나 가정에서 소규모로 수업을 이어가며 학업을 지속했다. 이처럼 수피아 여학교의 정신은 단순히 건물과 제도 의존이 아닌 진리를 지키자는 신념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수피아 여학교 출신 학생들은 이후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리에 항일 운동을 지원했고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는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이들은 단순히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아니라 신앙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실천가들이었다.

수피아 여학교의 신념은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그곳은 단순한 배움터가 아니라 신앙과 용기의 상징이 됐다. 신사참배 거부로 겪었던 어려움은 오히려 학교의 정체성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후 수피아 여학교는 독립적인 여성 교육기관으로 더욱 강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애양원에서의 선교와 비감자 아이들의 어머니

유 선교사는 교육뿐 아니라 의료 선교에도 헌신하며 여수 애양원(愛陽院)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그 가족을 돌봤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 속에서 고립됐으며 그들의 자녀들 또한 감염되지 않았음에도 교육과 보호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애양원은 단순한 치료 시설이 아니라 한센병 환자들의 재활과 신앙적 돌봄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유 선교사는 의료진과 협력해 환자들에게 치료 지원 뿐 아니라 그들의 손을 잡고 붕대를 감아주며 인간적인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신앙을 통해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버림받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다.

한센병 환자들의 자녀, 즉 ‘비감자(非感者·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들)’들은 감염 위험이 없음에도 사회적 차별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유 선교사는 이들을 위해 보호소를 운영하고 교육을 제공하며 편견을 극복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부모를 잃거나 돌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은 직접 입양해 따뜻한 가정을 제공했다.

그는 단순한 보호자가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신앙과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정체성과 자부심을 심어줬으며 차별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했다. 한센병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희망과 존엄을 심어주기 위해 헌신하며 직접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했다.

그의 사랑과 헌신은 단순한 자선활동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그가 돌본 비감자 아이들 중 훗날 교육자, 의료인, 종교 지도자로 성장한 이들도 있었으며 그의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수피아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화례 선교사가 남긴 유산과 광주여성길

유 선교사가 남긴 유산 단순한 교육기관이나 의료시설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 헌신의 정신이었다. 그는 한 개인의 헌신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줬다. 그가 돌본 한센병 환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이후에도 그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갔다. 부모가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로 버려졌던 아이들은 유 선교사의 보살핌 속에서 교육을 받고 신앙을 배웠으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그의 사랑과 신념은 일회성 자선이 아니라 한 세대를 넘어 지속되는 변화의 씨앗이 됐다. 1978년 고국으로 돌아가 1995년 102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국을 위해 기도하며 “내 마음은 언제나 한국과 함께 있다”는 깊은 애정의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유화례 선교사의 정신은 광주여성길을 통해 기려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며 여전히 그의 삶에서 배우고 역사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마음에 새긴다. 박영란 광주여성길 역사문화해설사

‘남자 좀 삶아주시오-유화례의 사랑과 인생’책 표지. 유화례 선교사가 한국어를 처음 배울 때 교인들이 “밤에 출출하실 텐데 뭐 좀 드릴까요”라고 물었는데 감자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 “남자를 좀 삶아주시오”라고 했다는 일화를 따서 지은 제목이다.
화순 산속동굴 앞 유화례. 수피아여고 교장시절 6·25 피난했던 화순 산속 동굴 앞 모습을 그린 그림. 출처=수피아여고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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