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았는가! 여성들도 투쟁·새로운 사회 꿈꿀 수 있다는 것을
기획

보았는가! 여성들도 투쟁·새로운 사회 꿈꿀 수 있다는 것을

광주여성가족재단·전남매일 공동기획-길에서 만나는 광주여성 100년의 역사
⑬ 장매성-그 시대 가장 급진적인 이름, 소녀회
소녀회, 광주여고보 여학생들이 결성
장매성, 시위·사회적 연대 실천 앞장

1929년 11월 광주의 양림교를 건너는 여학생 시위대의 사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손호철 제공
1929년의 광주. 조선의 미래를 바꾸고자 떨쳐 일어선 학생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 역사를 이야기할 때 종종 ‘광주고보’나 ‘성진회’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같은 시기 여성들이 이룩해낸 저항의 언어와 실천에 대해서는 침묵해왔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의 여학생들이 조직한 ‘소녀회’는 단순한 학교 내 학술 모임이 아니었다. 여성이 교육을 통해 민족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급진적인 결단이자, 식민지 조선에서 여학생들이 펼친 최초의 정치적 조직화였다.

소녀회는 1928년 11월 장매성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사회주의적 사상과 민족 해방, 여성 해방을 동시에 추구했던 이들은 매월 회비를 걷어 사회과학 문헌을 구입하고 장매성의 집에서 정기적인 토론과 교육을 진행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3중의 억압을 받던 조선 여성에게 있어 이 모임은 단지 이론 학습이 아니라 저항의 연습장이자 실천의 마당이었다.

광주여고보 비밀결사 소녀회 회원들의 사진.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학생비밀결사 소녀회,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손호철 제공


● 장매성 ‘가정의 딸’에서 ‘민족의 딸’로

장매성(1911~1993)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현 전남여자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열여덟 살에 소녀회를 결성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장재성의 여동생이었지만 그 이상의 존재였다. 오빠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적인 정치적 결단과 실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제는 판결문에서 장매성을 ‘공산주의자 장재성의 감화를 받은 자’라고 단정했지만 오히려 그 말은 당시 여성의 정치적 결단을 폄하하려는 기재에 가깝다. 장매성은 자신이 직접 동료 여학생들을 조직하고 목적과 회칙을 세우며 시위와 사회적 연대의 실천을 이끌어 나갔다.

광주여고보는 당시 전남지역 유일의 공립여학교로 1927년 개교 이래 일본인 교사들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여학생들은 자각하고 있었다. 장매성은 그런 구조적 억압에 맞서 여성의 삶과 위치를 성찰했고 소녀회를 결성해 여성해방의 대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단지 ‘누군가의 여동생’이 아닌 자기 목소리로 세계를 바꾸고자 한 여성 민족운동가의 상징적 존재로서 첫걸음이었다.

광주여성길 홍단심길의 장재성 빵집터. 장매성은 오빠 장재성의 영향에 한정되지 않은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 주전자와 붕대, 여성의 투쟁은 곧 치유

1929년 11월 3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일본인 학생의 성희롱 사건을 기점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본격화 됐다.

이 시위에서 광주여고보 소녀회원들은 다른 방식으로 싸웠다. 장작개비와 돌을 들고 맞서 싸운 남학생들과 달리,여학생들은 붕대와 도포약을 들고 부상자를 돌보고 치마 속에 물을 담은 주전자를 감춰 시위대에 제공했다.

거리에서 쓰러진 학생들을 업고 병원으로 실어 나르고 무너진 대열을 정비하는 그들은 곧 ‘주전자 부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장매성은 훗날 회고록에서 “우리는 치마에 돌을 싸서 날랐고 붕대를 들고 다니며 피를 흘리는 동지들을 치료했다”고 썼다. 그들의 투쟁은 단순히 부수고 해체하는 저항이 아니라 돌보고 감싸안으며 싸우는 여성적 방식의 항일 실천이었다. 폭력과 억압에 상처 입은 공동체를 치유하고 다시 일으키는 일, 그것이 바로 이 소녀들이 선택한 전투였다.

전남여고 역사관 앞의 소녀상.


● 국가폭력은 여성의 이름부터 지웠다

그러나 그 용기 있는 실천의 결과는 고통이었다. 장매성을 비롯한 소녀회원들은 1930년 체포돼 기소됐고 장매성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다른 동료들은 무기정학이나 퇴학 등의 징계를 받았다. 일제는 이들을 단순한 ‘학생의 일탈’로 간주하지 않고 광주학생운동 ‘총본영’ 중 하나로 지목했다. 그만큼 소녀회 결성과 활동은 체제 위협이 되는 급진적인 움직임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이들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늦게서야 장매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고 동료들에게도 포장이 뒤따랐지만 여전히 그 이름은 교과서에, 기념탑에, 지역기억 속에 뚜렷하게 각인돼 있지 않다. 그들이 입었던 교복은 여전히 ‘무대 밖’복장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발상지라는 표지가 세워진 전남여고 전경


● 장매성 그 이름 ‘역사가 되는 순간’

광주를 이야기하면서 5·18을 말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면 1929년 또다른 광주, 치마를 입고 주전자를 든 여성들이 있었던 광주 역시 우리는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장매성과 소녀회는 1920~1930년대 조선 여성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시대를 살아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장매성은 오늘의 젊은 여성들이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다시 꺼낼 때 그 뿌리로 존재한다. 여성도 투쟁할 수 있고 여성도 조직할 수 있으며 여성도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음을 증명한 이름. 이제 단지 한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여성항일운동의 복권이며 기억의 정치를 시작하는 이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왜 지금, 장매성인가?” 그 대답은 명료하다. 그 시대 가장 급진적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영희 광주여성길 역사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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