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도 찾은 온천...효험 못보고 불귀의 객 인생무상
관광대국튀르키예를탐하다

클레오파트라도 찾은 온천...효험 못보고 불귀의 객 인생무상

관광대국 튀르키예를 탐하다<14>고대도시 유적지 히에라폴리스

죽은 자의 도시 네크로폴리스에 내리는 어둠.
죽은 자의 도시 길거리에서 살아 있는 젊은 연인들의 희락. 연인을 안고 있다.
히에라폴리스와 파묵칼레는 지리적으로 붙어 있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함께 흥망성쇠를 겪은 불가분의 관계다. 둘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지만 하나의 관광지로 인식된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여행객들은 당연히 둘 다 관광체험을 한다.

히에라폴리스는 현재는 죽은 자들의 도시이지만 파묵칼레는 자그마한 관광도시로 번영하고 있다. 그래도 둘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복합유산에 해당되는데 1988년 등재됐다. 면적은 1077㏊(326만평)이다. 파묵칼레는 너무나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지도에 잘 나타나지 않고 근처 대도시 데니즐리에 속하기 때문에 데니즐리로 알아도 무방하다.

히에라폴리스는 파묵칼레 북쪽 완만한 산비탈에 위치하는데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한다. 두 유산이 붙어 있어 보통 함께 소개된다.

도미티아누스(프론티누스) 문 전경.
● 기원전 190년 건설·기원전 17년 재건립

히에라폴리스 역사는 소아시아 반도 다른 헬레니즘 도시들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됐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에 페르가몬의 왕이 건설했는데 기원전 17년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가 재건립한 도시 유적이다. 기원전 129년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한 히에라폴리스는 새로운 통치자 아래에서 번영했다. 이곳은 아나톨리아인, 마케도니아인, 로마인, 유대인들이 뒤섞여 지내는 ‘국제도시’였다.

히에라폴리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도 빌립보(Philip)가 87년경에 도미티아누스(Domitian, Domitianus) 황제에 의해 이곳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 고대 주교구 히에라폴리스의 기독교 건축물은 대성당, 세례당, 교회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이나 순례의 의미를 갖고 방문한 이들에게 주목할 만한 건축물은 순교자 성 빌립보 기념 성당(martyrium of St Philip)이다. 폐허 북서쪽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지만 시간 때문에 생략했다. 웅장한 계단 위에는 공간 구성이 독창적이고 평면이 팔각형인 훌륭한 건물이 있으며 절벽에 세워진 요새는 히에라폴리스 역사의 마지막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원형극장에서 내려오는 길에 안내판을 보고도 들를 수 없었다. 이미 언덕바지에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맨 꼭대기에 있는 원형극장은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둥근 관객석 위에서 내려다보는 파묵칼레 전망이 황혼에는 황홀할 정도로 숨을 멎게 하는 강한 매력이 있다. 방문했을 때도 황혼에 빛나는 석조 구조물이 옛 고적의 고색창연함을 진하게 풍기고 있었으니 놀멍에 한참 동안 빠져 들었다.

원형극장에서 남쪽 원거리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정상 부위가 온통 하얗다. 영락없는 튀르키예판 백두산이다. 꼭대기에 하얀 눈 같은 석회암 지대를 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튀르키예 산은 석회암 투성이라 하얀 먼지가 어디서나 풀썩이고 물맛도 석회암 미세가루를 다 걸러내지 못하고 있다.

히에라폴리스의 북문 체크포인트. 원형극장과 파묵칼레의 온천사진이 보인다.
히에라폴리스 원형극장.
● 미국 여행객 등에 새긴 한글 문신 ‘로리’

여하튼 원형극장은 버킷리스트에 들어 있다. 일정이 바쁜 관광객들은 시간이 다소 소요되는 원형극장은 흔히 생략한다. 히에라폴리스에서 출토한 유물이 전시된 구내 히에라폴리스 고고학박물관은 원형극장과 파묵칼레 온천지대 사이 위치하지만 일몰 상황에서는 관람할 수가 없었다.

일행 일부만 남겨두고 나지막한 언덕 저편 원형극장에 오르는 길에 어떤 백인 여성의 노출된 등판에 ‘로리’라는 한글이 보여 말을 걸었다. 마냥 즐거운 그녀는 주한미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미국 여행객이었다. 그녀 외에도 전체 여행 일정 가운데 한글로 문신을 새긴 튀르키예 여성을 만난 적이 있어 사진을 찍어 뒀다. 그 에피소드는 다음에 소개하겠다.

대형 공동묘지는 그리스와 로마시대 장례 풍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4~6세기 세워진 히에라폴리스 기독교 기념물은 대성당, 세례당, 교회 등으로 이뤄진 초기 기독교 건축물의 우수한 사례다.

히에라폴리스에는 크기와 디자인이 다양한 석축 무덤이 널려 있다. 이제는 그저 돌덩이들로 나뒹굴고 있으니 인생무상을 넘어 세월마저 무심했다. 유물 가운데 중심가로 들어가는 정문인 프론티누스(도미티아누스)의 문(Frontinus Gate)이 가장 거창했는데 세 개 아치형 통로문과 돌기둥 열주 회랑이 인상적이다. 그는 소아시아 총독이자 작가이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고 셔틀마저 끊어졌으니 히에라폴리스 긴 동선을 걸어가야 하는 처지에 옛 거대유적 주위를 세세히 뜯어보지 못해 아쉬웠다.

원형극장 올라가는 길에 만난 미국인 관광객 ‘로리’. 등에 이름을 문신했다.
● 인골 흔적 없는 무덤 ‘세월의 무상함’만

그래도 어느 거대한 석관의 무덤 속을 샅샅이 살펴봤는데 인골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바람에 날아온 먼지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수천년이 흘렀으니 인골은 분토가 돼 바람에 날리거나 땅속에 묻혔고 이제는 아래쪽 석회 온천의 물에 녹아 흐르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인간을 이룬 물질은 순환하니 윤회라고 하는 심오한 말도 이런 점에서 착안했는지도 모른다.

산자의 도시 파묵칼레와 위쪽 죽은 자의 도시 히에라폴리스가 함께 결연돼 있으니 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뒷면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북쪽 죽은 자의 도시인 공동묘지(necropolis)는 ‘북망산’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와 인생이 일장춘몽으로 비유되는 점을 알듯 싶었다.

당시 불치병 부자 가운데 일부는 클레오파트라도 치유하고 떠난 온천에서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됐다. 고향땅 가족들에겐 애석했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전대 또는 돈보따리가 두둑해 고귀한 석관에 편히 누울 수 있었다. 이국 하늘에서 까만 밤에 별이 뜨면 천리타향 망자들은 그 영혼이 시공을 초월해 고향의 추억을 찾아 왕래했겠지만 이제는 그마저 무상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살아있는 젊은 연인들은 마냥 즐거워 하며 애인을 번쩍 들어 올리는 등 희락을 만끽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김성후 동신대 명예교수

성 빌립보 성당과 무덤의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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