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시네코뮌 <12> ‘시네마’와 ‘코뮌’의 조합
김지하의 씨네코뮌

김지하의 시네코뮌 <12> ‘시네마’와 ‘코뮌’의 조합

상업화된 예술환경 속 자신만의 예술관 실현했으면
관습적 영화·사회적 고정관념벗어나
혁신적·실험적 작업 보여주는 공동체
비판적 생산자·적극적 소비자 연대 필요

피터 왓킨슨 감독의 <코뮌>(2000) 포스터
작년 12월 말부터 본지를 통해 ‘씨네 코뮌’이라는 타이틀로 11차례 기고했다. ‘씨네 코뮌(Cine Commune)’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ACC 시네마테크 사업이 시작되면서 필자가 처음 기획한 프로그램을 위해 ‘시네마’와 ‘코뮌’을 조합해 만든 행사명이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영화 관람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ACC 시네마테크 사업은 상업화된 예술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예술관을 실현하고자 하는 작가들과 그들의 다양한 작업들을 소개하자는 목적으로 시작됐다. 다행스럽게도 각국의 영화제와 작가, 기획자들의 다수가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작품을 무상 혹은 소정의 상영료로 기꺼이 제공해 줬다. 특히 ‘시네마테크’가 상영관이라는 제한된 의미를 넘어 본디 연구, 수집, 상영을 아우르는 예술영화 운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코뮌’이라는 단어가 매우 반가웠다는 후문들을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한편, 영화와 코뮌을 함께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문화적 급진성, 정치적 편향성을 비추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코뮌은 자치 공동체를 의미, 이 공동체는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운영 방식을 따른다. 코뮌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아마도 1871년 프랑스 파리의 노동자와 시민항쟁의 결과로 수립된 혁명정부인 ‘파리코뮌’ 때문일 것이다. 파리코뮌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민중이 주도로 수립된 자치정부라는 점에서 코뮌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는 기존의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영주권 남용이 심하던 시기의 사회 안정과 질서를 도모하기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결사체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코뮌이 정치적 급진성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히려 자치 공동체의 민주성과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했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코뮌이 정치적인 급진성을 내포한다기보다 환경적 요인이 코뮌을 정치적으로 급진적일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는 사회가 원활하게 운영, 유지될 수 있도록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기본적인 가치들이지만, 그러한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면 기득권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 ‘파리코뮌’은 그러한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자 지금까지도 우리는 무수히 비슷한 상황을 목격해 왔다.

‘씨네’와 ‘코뮌’의 조합을 통해 필자는 관습적인 영화, 사회적 고정관념을 벗어나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보여주고 응원하는 작가, 기획자, 연구자 그리고 관람자들의 공동체라는 의미로 해석해보고자 했다. 또한 영화는 심미주의적이어야 한다거나, 적어도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시선에서 보다 민주적이고 확장된 형식의 영화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녹아있다. 영화의 미학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회화중심의 평면적 사고를 깨고 착시와 이미지의 연속재생이 야기하는 인지적 혼란을 통해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미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벤야민이 미학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영화매체를 통해 발견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심미주의를 지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매체의 정치성이 거세되는 것은 아니다.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품들이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으로 벌였던 일련의 실험들은 심미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성을 견지하는 것과 상호 배치되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입증했다. 결국 영화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내용적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자체 검열하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18년 ACC 시네마테크 ‘씨네 코뮌’ 프로그램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작품은 단연 피터 왓킨슨(Peter Watkins) ‘감독의 코뮌(La Commune, de Paris 1871)’이었다. 무려 6시간 가까이 되는 오리지널 버전을 상영할 수는 없었고, 5년 후인 2005년에 3시간 30분으로 줄인 편집본으로 상영하기는 했으나 쉽게 볼 수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지역의 많은 관객들이 찾아왔다. 작품 ‘코뮌’은 파리 코뮌이 일어나게 된 과정들을 가상의 방송국인 마르세이유 방송과 코뮌 방송이 각기 다른 내용으로 전달하는 상황을 모큐멘터리(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피터 왓킨슨 역시 작품 상영을 매우 반가워하며, 다변화된 미디어 환경에서 절대적 확실성과 표준화된 형식은 없으며, 늘 관행이란 것을 경계하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매체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영화는 위기와 도전에 직면했다. 이미 1930년대부터 제기돼온 상업적 표준화와 콘텐츠의 획일화 문제는 언제나 영화에 대중성이라는 무기를 허락하면서 예술성의 소멸을 추동한다. 이는 비단 영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술발전으로 인해 다양한 콘텐츠들이 빠르고 새롭게 활력을 띠는 듯 보이지만, 점점 무거워지는 장비와 기술력, 예산에 비해 예술들은 점점 단조롭고 가벼워지는 위험성 또한 안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영화를 비롯한 예술문화가 질적인 풍부함으로 담보하기 위해서는 보다 비판적인 생산자와 적극적인 소비자의 연대가 필요할 것이다. <끝>

피터 왓킨슨 감독의 <코뮌>(2000) 작품이미지
ACC 시네마테크 첫 프로그램 <씨네 코뮌> /백남준 이미지, 브뤼셀 보자르 참여 및 이미지 제공
ACC 시네마테크 첫 프로그램 <씨네 코뮌> /백남준 이미지, 브뤼셀 보자르 참여 및 이미지 제공
ACC 시네마테크 관객과의 대화 전경

오늘의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