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씨네코뮌 <1> 재생, 일시멈춤, 돌아가기
김지하의 씨네코뮌

김지하의 씨네코뮌 <1> 재생, 일시멈춤, 돌아가기

영화를 예술로 맞이한 순간…비디오에 대한 강렬한 추억
디지털에서 느끼지 못하는 간절함
레트로 열풍 속 학창시절 추억 조각
10~20대 비디오와 함께 했던 시간
광주영화인 조대영씨 비디오 통해
기억 한 구석 되살리는 시간 선물

2만5,000개의 비디오테이프를 장르별, 연령별, 감독별로 구분해 선보이는 복고풍 전시 ‘원초적 비디오 본색’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복합전시 5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내년 2월19일까지 계속된다.
‘주말&’ 지면을 통해 김지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콘텐츠기획과 학예연구관이 전하는‘씨네코뮌’(Cine Commune) 연재를 시작한다. 코뮌은 공동체 라는 의미로 김지하 학예연구관은 영화와 문화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이다.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중인 2만5,000개의 비디오테이프(VHS)를 소재로 한 기획전시‘원초적 비디오 본색 ’을 기획하게 된 스토리를 시작으로 5차례에 걸쳐 비디오 관련 이야기를 전하고 이후 국내외 문화예술인들과의 영화이야기를 싣는다.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 전경
최근 ‘레트로’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레트로(Retro)’라는 단어는 ‘회상하다, 추억에 잠기다(retrospect)’에서 파생된 줄임말로, 과거에 존재했던 것을 다시 되살리고 재해석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유행으로까지 번지는 레트로 열풍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경제적 불황에 의한 사회적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마치 만병의 근원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결론지어지듯이 말이다. 레트로 열풍의 한 측면에는 분명 디지털 스트레스도 있을 것이다. 과도한 자동화와 복제품들에 둘러싸인 피로감 때문에 스스로 조작하고 제어할 수 있는 추억의 골동품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문화예술은 나날이 디지털 기술로 인해 풍요롭고 화려해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제공해주는 편의성과 풍족함은 OTT플랫폼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선택’과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시간의 절약과 함께 언제든 다시 되돌릴 수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돌아가는 찰나에 나의 취향까지 정해주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편리함을 제공해주지만, 스스로 결정하고 찾아내려는 간절함과 거기서 얻게 되는 쾌감을 단절시킨다. 필자는 줄곧 디지털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여왔지만 최근에서야 그 이유가 디지털의 피상성 때문이 아니라, 디지털에서 느끼지 못하는 간절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영화와 음악을 간절히 찾아다녔던 기억들은, 비디오테이프 4~5편 대여 비용이면 OTT에서 수백편의 영화를 맘껏 볼 수 있고, 연체료까지 낼 수 있는 비용이면 또 다른 OTT 플랫폼에서 수십편을 골라볼 수 있는 현재와 대체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디오 창고에 있는 조대영/최성욱 촬영
필자도 비디오대여점에서 영화테이프를 빌려 보면서 대부분의 여가시간을 보내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듯 부모님 안방에 있던 비디오테이프가 유익한 성교육 교재였다. 하루는 중학교 때 학교 수업을 마치고 비디오를 빌려 부모님 오시기 전에 빨리 보려고 비디오기기에 이미 넣어져 있던 비디오를 꺼내는데, 평소보다 슬로우모션으로 빨간색 띠 종이를 두른 비디오가 서서히 나왔다. 붓글씨처럼 갈겨쓴 서체로 ‘비터문’이라고 쓰인 테이프는 라벨부터가 자극적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했고, 그대로 다시 밀어넣고 빨리 되감기를 한 다음 재생하는 순간 유럽풍의 배경과 배우들, 그리고 유람선이 등장했다. 등장인물인 두 커플이 모두 신경질적이면서 피곤해보였다. 뭔지 모르지만 유럽스타일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내가 예상하던 장면들이 중간중간 나오기 시작했다. 주인공 부부 오스카와 미미가 식탁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조지 마이클의 노래 ‘페이스(Faith)’가 흘러나오면서 나의 귀와 눈을 쫑긋하게 만들더니 그때부터 화면이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몇 번씩 다시 돌리고 재생시켜도 무슨 장면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흐릿했지만, 사람들이 한 번만 보고 지나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비디오가 몸소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중간에 포기하고 비디오를 꺼낸 순간 이 비디오를 부모님이 어디까지 봤는지는 몰라 내가 빌려온 비디오와 함께 급하게 반납하고 부모님께는 그냥 아무생각없이 한꺼번에 반납해버렸다고 거짓말했다.

이후 잔상이 떠나지 않아 비디오가게에서 조심스럽게 비디오케이스를 찾아봤다. 케이스에는 “예술이냐, 외설이냐”와 함께 ‘귀재(鬼才)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라고 써 있었다. 이후로 예술과 외설의 논란에 서있는 영화들을 찾아 맘씨 좋은 여자 사장님이 계시는 날 몇 개의 비디오 중에 하나씩 넣어서 혼자 있던 낮에 학원가기 전 빨리감기로 제일 먼저 보고 바로 반납하곤 했다.

그러다 하루는 빨리감기를 멈추고 영화란 게 무엇인지 자못 진지하게 생각했다. 영화의 미장센부터 음악, 촬영, 편집 등이 아우러진 연출기법과 기능에 대해서 깨닫게 되면서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경외감이 들었다. 나의 불순(?)했던 의도를 반성하면서 영화를 예술로 맞이한 순간이었다. 그 작품은 바로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였다. ‘피터 그리너웨이’감독을 처음 알게 됐고, 이후 이 감독의 ‘동물원’,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등의 영화들이 미치도록 보고싶었지만, 내가 살던 동네 주변의 비디오가게를 모두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키노’에 가끔 등장하는 감독의 근황과 정보들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키노’에서 꼭 봐야 한다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다는 데 매번 실망했다. 과연 ‘키노’의 필진들은 이런 영화들을 다 보기는 한 건지, 어디서 테이프를 구하는 건지 의심 반 부러움 반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때 그 기억을 간직하면서 나중에 커서 비디오 사장이 되거나 이 비디오를 죄다 볼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필자는 결국 대학교에 들어가서 그때 보고 싶었던 비디오를 보거나 복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그 시절에 본 영화가 그때 이후부터 지금까지 본 영화보다 훨씬 많을 정도도 10대와 20대를 비디오와 함께 살았다.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 전경
약 2년 전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최성욱 감독의 ‘호모 시네마쿠스’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광주영화인 조대영의 영화인생을 추적한 다큐멘터리였고, 소문으로만 듣던 조대영 선생님의 비디오 창고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 계림동 대명맨션 지하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은 마치 영화 ‘구니스’에서 보물을 찾기 위해 해저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 비디오 동굴은 몇 주 전에 지나간 장마로 습한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에 깔린 나무판자들도 눅눅해져 비디오테이프들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5만 장의 비디오들을 빨리 구조해야한다는 생각과 함께 이 엄청난 광경을 소수만 보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개인의 열정과 사회와의 타협 사이에서 미끄러짐을 반복하고 포기해가던 필자에게 조대영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몽상가처럼 보였고, 이 소우주 속 보물들을 보존함과 동시에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나처럼 기억 한구석을 되살리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용가치가 사라진 것을 되살리는 방법은 그것을 제도적 틀 안에서 전시화하는 방법이다. 이미 복제품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예술 공간에 물성 그대로의 것은 더 강한 고유성을 발휘한다. 여기에 공동의 삶과 기억이 담보된다면 순간적인 체험 이상의 여운을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조대영 선생님께 이 비디오테이프를 모두 바깥으로 꺼내 전시하자는 제안을 드렸고, 선생님은 “함 해보시죠!”라는 말씀으로 수락해주셨다. 만약 선생님께서 흔쾌히 동의해주시지 않았다면 이처럼 무모한 시도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세대, 그리고 나의 선배, 부모님 세대들은 모두 비디오에 대한 강렬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비디오는 OTT에서 경험하는 병렬적 시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생하거나 잠시 멈추거나 아니면 되돌리는 단순한 작동논리 안에서 많은 사건들과 추억을 만들어낸다. 필자는 몇차례에 걸쳐 비디오 시대의 개인적 단상들을 꺼내보고자 한다. 지금은 희귀한 유물이 되어버렸지만, 다른 어떤 장치보다 간절함을 주었던 비디오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진정한 레트로가 아닐까.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 전경
ACC 시네마테크 기획전시

‘원초적 비디오 본색’ 아날로그 미학·영화광 탄생



K-컬처가 국제문화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가운데, 지금의 한국영화에서 ‘비디오테이프’의 유산은 무시할 수가 없다.

비디오 산업의 호황기는 영화전문잡지와 영화애호가(씨네필)의 등장, 대기업 자본에 의한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 영화의 학문제도 편입 등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산업의 생산자 혹은 수용자들은 ‘비디오 키즈’로서 VHS를 통해 영화를 향유하고 이해하며, 또 수집하기도 했다. 비디오는 1976년 일본의 전기회사 ‘빅터(JVC)’가 가정용 비디오테이프 모델(VHS)을 생산하면서 대중적으로 보급됐다. VHS의 실용성은 영상 시장의 활성을 가속화시켰고, 영상제작사와 유통사뿐만 아니라 가정 내에서까지 진입하며 문화 활동의 큰 축을 차지하게 되었다. 예술 안에서는 VHS의 생산 이전인 1950년대부터 ‘소니(SONY)’에서 생산한 포터백 카메라를 통해 비디오 매체에 대한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재생 II일시정지 ■정지 그리고 ◀◀ 되돌리기’라는 비디오의 재귀적, 촉각적 특성은 매체를 형식적 도구가 아닌 심리적인 장치로 활용하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비디오아트에서 ‘나르시시즘의 미학’이라고 일컬어지던 ‘자기반영성’은 오늘날 이른바 ‘셀프카메라’와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 ‘유튜버’들을 연상케 한다. 이처럼 참여적이고 소통적인 비디오는 한 세기의 문화예술 전반에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으며, 개인과 공공의 역사에 자리 잡고 있다.

‘원초적 비디오 본색’은 비디오의 역사 안에서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VHS’, 그 안에서도 대중적으로 소구되어 왔던 ‘영화’에 집중하고자 한다. 영화 비디오 문화는 생산자와 수용자, 제도권과 비제도권 모두 실천적이고도 매우 능동적이었다. 전시된 VHS 대부분은 광주영화인 조대영씨의 소장품들로, VHS를 날 것 그대로 전시 소재에 사용함으로써 현대에서 느끼기 어려운 ‘물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전시 ‘기획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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