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옥에 핀 꽃-한국영화 회고전’ 웹페이지 대표 이미지로 소개된 ‘무제 77-A’(1977)의 한 장면. |
호주에서 개최된 역대 한국영화 회고전 안에서도 가장 큰 규모이니 만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표 감독들의 이름과 작품들이 총망라됐다. 한국영화의 최고의 쾌거라 할 수 있는 봉준호의 ‘기생충’을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비롯한 최신작 ‘헤어질 결심’과 장선우, 박광수, 홍상수의 작품, 김기영의 ‘이어도’, ‘하녀’까지 거슬러 내려간다. 그야말로 한국영화 황금기가 도래하기까지의 걸작들을 스무 편 이상 소개하면서 이들을 지옥에서 피어난 꽃으로 비유한 것이다.
영화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시대의 흐름을 세련되면서도 거칠게 담아낼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담아내냐에 따라 역사적으로 남는 걸작이 되거나 망작이 된다.
본 회고전은 한국의 격동과 질곡의 역사를 ‘지옥’으로 표현하면서 식민지 시대와 남북전쟁, 그리고 군부독재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엄혹한 환경 속에서 예술의 가치와 정신을 잃지 않고 창의적인 작품으로 발현시킨 감독들과 그들의 작업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낸다.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대기업 중심의 자본주의와 빈부격차, 가부장 사회에 대한 부작용 또한 놓치지 않으며 그러한 사회 분위기 안에서 표현되는 풍자영화들과 블랙코미디, 누아르 등의 장르영화들을 거론한다. 그리고 이 용기 있는 영화들이 지금의 ‘K-시네마’라는 화려한 꽃의 밑거름이 되어준 것임을 재확인시킨다.
회고전의 탄탄한 프로그램 안에서도 특별히 더욱 언급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 장편극영화들이 소개되는 가운데 유일하게 단편들을 모아놓은 섹션이 있는데, 그 안에서 비중 있게 소개되는 작품이 바로 ‘카이두 클럽’ 한옥희 감독의 실험영화들이다. ‘카이두 클럽’은 본 칼럼 9회 차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최근 한국영화를 비롯한 세계여성예술사 관련 전시와 상영에서 재조명받고 받고 있다. ‘카이두 클럽’은 한국 최초로 여성들로 구성된 실험영화 제작집단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시네마테크에서는 카이두 클럽의 리더이자 연출을 맡았던 한옥희 감독의 작품과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몇 년 전부터 해외 주요 미술관과 영화관에 소개해오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과정의 결실이 이번 회고전을 통해서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 측에서는 본 회고전을 준비하기 위해 무려 일 년도 넘게 한국영화 자료들을 조사했고, 카이두 클럽 활동 당시의 한옥희 감독의 작품을 비롯한 한국 실험영화 자료들을 궁금해했다. 그리고 한 감독의 작품 ‘구멍’, ‘2분 40초’, ‘무제 77-A’, ‘색동’, ‘구멍’ 총 다섯 편을 요청함과 동시에 본 회고전을 알리는 웹페이지에 봉준호, 박찬욱 작품들도 아닌, 한옥희 감독의 실험영화 ‘무제 77-A’의 장면을 기획전의 대표 사진으로 올렸다. 또한 이 다섯 편의 단편 실험영화들을 모두 묶어 드럼연주와 함께 특별 공연 이벤트로까지 보여줬다.
유신정권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활동한 ‘카이두 클럽’은 당시 사회문화 제도 안에서 드러내기 어려웠던 페미니즘, 실험, 검열, 저항이라는 키워드들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작업했다. 문학, 회화, 무용, 언론학 등 다양한 전공을 공부했던 여성들이 모여 새로운 창작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그려내고자 했던 이들의 작업은 지금의 융복합 제작의 선구적 모델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의 영화들이 시대의 암울함을 여성이라는 메타포를 활용하여 호스티스영화, 멜로영화들로 그려낼 때, 당대의 젊은 지식인들과 함께 심포지엄 ‘여성과 영화세계’를 개최하며 이를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시위와 비슷한 퍼포먼스로 보여준 것도 카이두 클럽의 주요한 활동이다.
최근 ‘K-컬처’라는 단어가 한국의 정체성과 동일시될 만큼 부쩍 거론되고 있지만, 해외에서 알고 싶어 하는 한국문화와 한국이 드러내고 싶어 하는 문화가 조금씩 비켜나가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특히 상업 시장이 아닌 예술 산업 내에서 더욱 그러한데, 예술은 동시대의 희열과 쾌락에서 오는 것이 아닌, ‘비틀림’ 안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보다 오래전 문화강국이 된 나라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의 빗나간 역사를 재구축하고 현대 문화자산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이 가장 진취적인 형태로 생산되는 것을 존중하는 모습은 우리가 참고해야 할 지점이다. 호주를 대표하는 미술관이 내놓은 기획의 배경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이들이 정말 주목하고 싶은 것은 ‘K-컬처’의 단편적인 현주소가 아닌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와 아직도 다듬어지지 않거나 삭제돼버린 역사다.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의 한국영화 회고전 제목을 보자마자 오래전 외신에서 한국 상황을 비꼬며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보도한 사례가 떠올랐다. 역설적으로 호주 미술관은 쓰레기통도 아닌 지옥에서도 피어난 꽃의 사례를 한국영화를 통해 당당히 꺼내놓았다. 어느덧 우리는 비옥한 토양으로 변모했고, 향후 장미화원이 만들어질지 방부제를 쳐야 하는 상황이 될지는 문화생산자와 수용자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다. 필자는 가지치기를 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 카이두 클럽 ‘구멍(한옥희 연출)’의 한 장면. 단두대처럼 생긴 밧줄 아래에서 춤을 추는 청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
![]() 카이두 클럽 ‘색동(한옥희 연출)’의 한 장면. 여성을 조각품 혹은 단순한 피사체처럼 바라보는 사회 모습을 은유하는 장면 |
![]() 카이두 클럽 ‘색동(한옥희 연출)’의 한 장면. 여성을 조각품 혹은 단순한 피사체처럼 바라보는 사회 모습을 은유하는 장면 |
![]() ‘여성과 영화세계’ 취지문과 프로그램이 실린 내지. “한국영화에는 여자가 없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카이두 클럽의 취지문(좌). 변인식 영화평론가, 이어령 문학평론가 등은 카이두 클럽과 교류를 활발히 하며 심포지엄에도 함께 참여했다.(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