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바비’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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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비’ 스틸컷 |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 게임이 영화로 등장하고 있다. ‘레고’, ‘트랜스포머’부터 ‘슈퍼마리오’까지 한 시간 이상의 광고 혹은 뮤직비디오를 보듯 그 현란함에 빠져들다 보면 내가 상상한 세계와의 괴리가 생기면서 더 이상 동심에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 씁쓸해지기도 한다. ‘개구쟁이 스머프’가 3D 영화가 등장했을 때 너무나 매끈해진 스머프들을 보고 기겁을 하고 ‘피카추’의 귀여움에 다시 속았다가 며칠 전 실사판 ‘바비’를 봤다.
“태초에 아기 인형이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 멋진 문구와 ‘바비’ 라는 핑크색 두 글자가 필자의 무의지적 기억을 건드렸다. 동생과 다섯 살 터울이 있었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동생과 인형놀이를 자주 하곤 했는데, 당시 바비를 비롯한 미미, 라라, 장미, 유미가 떠올랐다. 바비 외에 나머지 인형들은 상대적으로 덜 비쌌지만 장미는 너무 도도했고, 미미와 라라는 성인도 아이도 아닌 뭔지 모르겠지만 어색한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한국태생이지만 얼굴의 3분의 1을 차지한 크고도 동그란 눈에 청초한 얼굴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나마 바비가 성인이 될 나 자신을 가늠도 못할 시기에 적당히 멋진 여성의 역할로 대체할 수 있었으나, 값비싼 바비를 여러 개 둘 수는 없었기에 한 명의 바비에게 모든 판타지를 가득 심어놓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바비의 신화로 시작한다. 아주 먼 옛날 어린 소녀들이 아기 인형을 안고 엄마놀이를 하는 있는 사이 갑자기 하늘에서 핑크색 직사각형 박스가 떨어진다. 이 새로운 물건을 마주한 순간 아이들은 젖병과 인공 젖꼭지를 던지고 돌보고 있던 아기 인형을 부수기 시작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패러디한 장면은 유인원이었던 소녀들이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이 인형은 ‘바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대통령 바비, 과학자 바비, 의사 바비, 작가 바비, 미스코리아 바비 등 모든 멋진 여성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이 무수한 능력자 바비들은 바비들의 에덴동산인 바비랜드에 살고 있다. 바비랜드에는 태초에 바비가 있었고 그 이후에 ‘켄’이라는 남자가 탄생한다. 바비들은 자신들의 드림하우스에서 일어나 매일 행복하고 완벽한 삶을 살아간다. 바비는 다른(혹은 모든) 바비들과 해변에서 논다. 해변에는 언제나 바비들을 바라보는 켄들이 있는데 그들의 직업은 바비와 달리 뚜렷한 직업이 없고 단지 ‘해변’ 일뿐이다. 어느 날, 파티 도중 바비는 죽음을 떠올린다. 바비가 자의식을 갖게 된 순간이다. 바비가 현실세계에서 그 어떠한 지위도 갖지 못하고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함께 현실세계로 떠난 켄은 가부장제를 발견한다. 현실과 바비랜드를 오가며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은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는 미래지향적 메시지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영화의 공식을 따라간다.
영화 ‘바비’가 국내에 공개되면서 일방향적인 여성우화로 그려낸 페미니즘 영화라는 평가가 쏟아지고 있다. 양극으로 갈리는 평가가 영화 자체로 봤을 때 어떤 의견에서든 볼 가치는 있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시선에서 ‘바비’는 젠더문제를 떠나 사회현실의 명과 암으로 다가오며 이 지점이 불편하면서도 마냥 실사판 장난감 영화로 보지 못하게 한다. 영화 ‘바비’는 12세 이상 관람가로, 이미 인형놀이를 졸업한 세대가 보는 영화다. 따라서 인형을 통해 실재와 상상을 넘나드는 판타지 동화가 아님이 전제된다.
바비사회 안에서의 바비는 늘 정돈된 옷차림에 자신감 있고 매사 긍정적이며 모두에게 사랑받는 능력자이다. 그녀는 먹는 둥 마는 둥 와플 하나로 식사를 때우며 자기 관리를 하고 수만 가지의 역할들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총총 뛰어다닌다. 사교생활도 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에 춤을 추러 갔다가 이렇게 생활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 찰나의 순간에 바비는 땅에 발바닥을 붙이고 ‘글로리아’라는 에고를 찾으면서 이상적 삶과 현실의 동요가 시작된다. 한편 ‘켄’은 바비랜드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병풍 같은 존재지만 현실세계에 바로 적응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본능적으로 습득한다. 그리고는 바로 구직 활동에 나선다. 이 영화를 여성, 남성의 역할을 떠나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면 물신주의가 가득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노동자와 관리자의 유형들을 만나게 된다.
현실을 인지한 바비는 바비랜드로 돌아와 새로운 바비가 되고자 한다. 이 부분이 어찌 보면 영화의 몰입을 최고조로 방해하는 시퀀스가 된다. 사회의 불평등을 외치며 바비로서의 파업을 선언하는 듯 하지만, 페미니즘 이론서를 훑고 지나칠 정도로 내용을 읊는 듯한 모습은 이미 수동적 역할에 익숙해진 바비에게는 가장 어색한 장면으로 비친다. 오히려 바비 자신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바비의 또 다른 직업인 마텔사의 대변인으로 보이는 것을 왜일까.
바쁘게 돌아가지만 무미건조한 현실이 바비라는 실제 상품을 통해 그려지기에 더욱 현실적이고 슬프게 다가온다. 사회 안에서 각자의 이름 없이 또 다른 ‘바비’ 같은 공동체 이름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어른들의 잔인한 판타지 ‘디스토피아’의 세계와도 같다. 영화 ‘바비’의 가장 성공적인 부분은 컴퓨터 그래픽의 느낌을 최소화하고 ‘물성 그대로’의 질감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던 프로덕션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바비의 미술적 전략이 바비의 장대한 설교보다 영화가 드러내고자(혹은 감추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모습들을 성공적으로 재현해 낸다.
우리의 영원한 언니였던 바비가 수십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현실적이고도 노련해진 사이, 필자는 바비보다 훌쩍 나이가 들어버렸다. 역시나 실사판이 주는 씁쓸함이 있지만 단순히 향수와 감성을 자아내는 신파물과는 다른 모습, 우리가 사는 핑크빛 찰나의 명암을 깨닫게 해준 바비가 연민과 동시에 더욱 사랑스러워진다.
/김지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