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씨네코뮌 <6> 예술·실험·독립영화의 세 가지 갈래들
김지하의 씨네코뮌

김지하의 씨네코뮌 <6> 예술·실험·독립영화의 세 가지 갈래들

독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지의 영화감독 하룬 파로키 특별전 포스터_국립현대미술관
축제 시즌이 돌아왔다. 2주 뒤에 개막하는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전주국제영화제가 이어지고, 연말까지 국내 문화예술의 굵직한 행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예술성과 실험성이 돋보이는 각국의 작품들을 가까이서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하지만, 한편 이런 작품들이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난해한 체험일 수밖에 없다. 특히 오락으로서 즐기고 싶은 영화 관객들에게 영화제의 상영작들은 지루한 작품들로 평가 절하되기도 한다. 미술이나 공연 작품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아직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문해보기도 하면서도 영화는 왜인지 불쾌하고 ‘이것이 영화냐’는 본질적인 부분까지 가감 없이 비판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가 시간 대부분이 영화 관람인 점을 생각해 보면 다른 예술분야와 비교할 수 없는 관객들이 존재하며, 영화를 많이 본다고 자부하는 관객들도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와 영화제 혹은 미술관에서 만나는 영화들 간의 괴리를 느끼는 관객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재밌어야 한다는 선입견은 관객의 소양 문제라기보다는 그동안 영화의 다양성을 차단해 왔던 국내의 영화산업과 제도의 후유증과도 같다.

유럽과 북미, 그리고 일본의 경우 1920년대 이후 영화 운동 속에서 일어난 상업영화와 아방가르드 영화, 예술담론 안에서 뜨겁게 논의되어 왔던 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다양한 장르와 제작방식들이 생겨났다. 국내를 비롯한 군부독재시대를 겪은 조그만 나라들의 경우 폐쇄적인 영화정책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문화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1960-1970년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아직까지 영화가 멀티플렉스 영화관 속의 오락거리로서의 잔재로 남아 있다. 다만 최근 들어 암흑기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굳건히 제작해 온 작가들의 작품들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이 영화들은 여전히 일반 상영관의 진입은 어렵지만 영화제, 미술관 등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며 특히 우리와 비슷했거나 여전히 진행 중인 태국, 필리핀 등의 영화들이 그동안 기술되어 왔던 영화역사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다.

국내에 영화제들이 너무 많다고 하지만, 큰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그곳에서 보여주는 동일한 영화들, 그리고 소수의 독립영화관과 예술영화전용관의 영화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다. 미지의 영화감독들과 작품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은 현실적으로 영화제밖에 없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들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영화제가 많을수록 좋다. 영화제는 잠재적 영화애호가들을 진정한 씨네필로 거듭나게끔 하며, 역사를 비켜간 영화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상업영화관에 미진입 혹은 진입거부하는 영화들이 영화제들 안에서 유통이 되고 지속적으로 서바이벌할 수 있어야 영화 산업이 두터워지고 관객들의 소양 또한 높아질 수가 있다.

누벨바그의 거장 아녜스 바르다 감독 추모기념 포스터_제72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 포스터
영화제에서 혹은 영화를 소개할 때 가장 많이 보이는 세 가지 용어가 있다. 바로 예술영화, 실험영화, 독립영화다. 각종 수식어와 함께 소개되는 이 영화들은 혼용되기도 하고 오역되기도 한다.

예술영화는 산업적 용어나 장르라기보다는 영화제나 평론가 등의 전문가 집단 혹은 역사적 흐름(예를 들어, 1950년대 미국 헐리웃 상업영화가 시간이 지나 고전명화로 불리어 버리는 등)이라는 외부적 환경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독립영화는 대기업 자본에서 벗어난 영화, 독립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영화부터 아마추어 영화까지 영화의 제작방식, 즉 산업적, 제도적 측면에서 구분되는 용어로 쓰인다. 일본의 경우는 독립영화를 스스로 작업한다는 뜻인 ‘자주(自主)영화’로 사용하면서 상업영화와 명확히 구분을 짓고, 해외의 경우는 그대로 ‘인디펜던트/인디 영화’로 사용한다.

실험영화는 작품의 형식적 측면을 얘기하는 것으로, 영화와 미술을 비롯한 미디어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장르로써 얘기되고 있다. 따라서 영화제 외에도 미술관에서 영상작가의 작품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영화가 정의하는 영역들을 교차하고, 교집합을 이루는 영화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같은 용어로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는 없다. (가령 실험영화 형식으로 만들어진 독립영화가 예술영화로서 인정받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이후에 소개하고자 한다.)

모든 영화는 예술이라는 일반적 의미와는 구별된 ‘예술영화’는 일반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로 평가받는다. 앞에서 세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을 말한 바와 같이 그 누구도 제작 단계부터 ‘이것은 예술영화다’라고 규정짓지 못하는 것이 독립영화, 실험영화와의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떠한 영화들을 예술영화로 인식하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어에서 내포하듯, 예술영화는 영화가 만들어진 초창기부터 단순 오락거리와 구별하고 싶어 하던 감독과 제작자들의 다양한 시도에서 시작된다. 대표적으로는 1907년 프랑스의 제작사 ‘필름 다르(Film d‘Art)’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당시 고급예술이었던 연극이나 고전문학들을 영화화하면서 연극무대의 확장판, 문학작품의 실사판으로 관심을 불러 모았다. 이미 인정받은 작품들을 더욱 화려하고 매끄럽게 보여주는 전략과 공인된 스토리는 동영상으로 보아도 훌륭할 것이다 라는 관객들의 막연한 믿음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제19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포스터
한편 이후 50년이 지난 미국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술 다큐멘터리의 대모라고도 불리는 페리 밀러(Perry Miller Adato)는 조지아 오키프, 유진 오닐, 피카소 등 유명 예술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이 영화들을 예술영화관을 통해 공개했다. 이 역시 훌륭한 예술가들의 삶을 다루는 영화는 예술로서의 영화적 가치를 띠며, 배우들의 가짜 삶을 다룬 영화와는 다른 장르의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영화 제작사들의 예술영화 만들기 기획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으나 현재 넷플릭스 등의 OTT 플랫폼의 큐레이션과 추천 알고리즘을 보면 현재까지도 통용되는 듯 하다.

실제, 영화사에서 예술영화로써 기술되는 영화들은 위의 제작사들의 영화들과는 차이가 있다. 현재 예술영화로 위치지어 지는 영화들은 앞서 말한 대로 예술문화운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탄생되고 재위치 지어 진다. 이들 영화들은 영화사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독일표현주의, 소비에트 영화, 프랑스 누벨바그 등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영화의 미학적 측면, 감독의 방법론적 측면, 예술사조의 측면에 따라 의미와 해석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서 용어나 장르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각 매체나 장르들의 특징, 시대적 배경, 미학적 가치 등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혼성 또는 융복합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번 호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세 가지 영화 용어를 시작으로, 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되고 확장되어 가는 예술영화, 실험영화, 독립영화의 개념과 배경들, 그리고 주요한 작품들을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해보고자 한다.

/김지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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