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기 박사와 함께하는 <인문학으로 세상보기> 황제의 역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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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기 박사와 함께하는 <인문학으로 세상보기> 황제의 역사 (4)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시작된 로마의 황제는 팍스로마나(Pax Romana)로 불리는 오현제 시대(96-180)를 정점으로 그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갈리에누스 황제(재위 253-268) 때는 군인이나 귀족들 중에서 황제를 참칭하는 자가 19명이나 나오는 하극상이 전개된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재위 270-275) 때는 황제가 광대한 국경과 경제력의 불균형 등으로 발생한 제국의 혼란을 '정신적 요소'로 해결하고자 '태양교'라는 종교를 들고 나왔다 황제의 의도에 의혹을 품은 세력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8)는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해결책을 제시한다. 바로 로마 제국을 1차 동·서 분할(284년)에 이어 다시 4지역으로 분할(293년)해, 2명의 황제(아우구스투스)와 2명의 부황제(카이사르)가 각각 분할 통치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거점은 로마가 아닌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였다. 이때부터 로마는 제국 천년 수도로서의 영광의 빛을 잃게 된다.



황제 권위 하락과 로마의 쇠망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는 4분할의 제국을 다시 하나로 합친다. 그리고 물리적 해결책이 아닌 '정신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속주국인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종교인 기독교를 로마 세계에 공인(313년)하는 것이었다. 다시 1인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의 수도도 로마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을 딴, 안전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 콘스탄티노플이었다.

황제들의 물리적·정신적 해결책 제시에도 제국의 혼란은 종식되지 않는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재위 364-375)는 기존의 '기독교 공인'에 물리적인 '국토 2분할'을 더한다. 동로마, 서로마로 제국을 나누어 두 명의 공동 황제가 각각 다스리는 방식이었다. 황제는 동로마를 동생 발렌스 황제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서로마를 맡았다. 물론 이 때도 더 이상 '로마의 영광'은 없었다. 황제는 서로마의 수도로 로마가 아닌 밀라노를 택했다. 시소나 국가나 한번 기울기 시작하면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기독교 공인'이라는 정신적 해결책과 '제국 분할 통치'라는 물리적 해결책만으로는 기울어져 가는 제국을 바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379-395)는 기독교 공인을 넘어 '기독교 국교화'(392년)라는 강력한 정신적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러나 기독교를 통한 로마 세계의 통합도 로마의 쇠망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결국 서로마는 476년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1,200여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황제' 역사 역시 503년(BC27-AD476)으로 마감한다. 물론 동로마의 황제 역사는 지속된다.

76년 중단된 서유럽 황제의 역사는 그로부터 324년이 지난 800년에 프랑크 카롤링거 왕조의 2대 군주인 샤를마뉴(재위 742-814, 별칭 카롤루스 대제, 카를 대제)에 의해 다시 되살아난다. 아버지 피핀에 이어 2대에 걸쳐 바티칸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황 레오3세(재위 796-816)가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어준 것이다.

물론 샤를마뉴의 업적도 당연히 황제 칭호를 받을만 했다. 샤를마뉴가 차지한 땅이 유럽 대부분에 이르고 있어 300여년 전 서로마 황제의 지배영역보다 더 방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를마뉴가 황제의 관을 쓴 것은 단순히 교황의 자신에 대한 호의 감사 표시나 샤를마뉴가 넓은 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황제 대관 이벤트에는 보다 정치공학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바로 유럽의 권력 구도, 멀리는 유럽 너머 세계와의 권력 구도와, 세속과 종교의 현실적 상호 필요에 의한 세력 연합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



헤라클리우스1세, 비잔틴제국 규정



동로마는 같은 유럽이고 기독교권이지만 사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동·서 로마 분리 이후 서로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헤라클리우스 1세(재위 610-641) 때부터 동로마의 황제는 더 이상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불리지 않고 그리스어로 황제의 의미인 '바실레우스'로 불리게 된 것처럼, 역사는 헤라클리우스 1세 때부터의 동로마를 유럽적이지도 않은 아프리카적이지도 않은 아시아적이지도 않은 정치·문화를 가진 '비잔틴 제국'으로 규정하였다. 서로마와 분명히 구분되는 다른 문화를 갖게 되었다는 의미다.



/인문경영 작가&강사·경영학 박사



※출처: 신동기 저 '오래된 책들의 생각'(2017, 아틀라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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