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기 박사와 함께하는 <인문학으로 세상보기> 이백과 두보는 살아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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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기 박사와 함께하는 <인문학으로 세상보기> 이백과 두보는 살아 있다(2)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보다 자(字)인 태백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백의 시풍은 한마디로 '정신의 자유'이다. 젊은 날의 협기(俠氣)와 만년의 신선(神仙)에 대한 관심, 그리고 술을 문학의 원천으로 삼았던 이백은 평생을 방랑으로 일관하며 '정신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런 그였던 만큼 중국 문학사에서는 그를 시선(詩仙)이라는 높은 이름으로 기린다. 시적 표현에 있어 인간의 세계를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다.



정신의 자유 추구한 이백



흐드러진 달빛과 처연한 꽃잎 아래 한병의 술을 놓고 달과 그림자 벗 삼아 혼자 노래하고 춤추면서 시공은 물론 정감까지 막힘없는 영원을 꿈꾸는 시인은 정녕 신선일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인간사, 인간의 심리 및 자연사에서 찾은 새로운 감동을 엄격한 형식과 성숙된 기교로 표현코자 했던 두보는 시적 완벽을 추구한 위대한 인간이었다.

그런 두보였던 만큼 문학사에서는 시적 표현에 있어 가장 뛰어난 인간이라는 의미로 그를 시성(詩聖)으로 칭송하고 있다. 절을 찾아 하룻밤을 지내며 깊은 산속의 영묘한 바람과 쏟아져 내리는 달빛에 온 마음을 적시면서도 새벽 종소리에 깊은 성찰을 다짐하는 두보는 정녕 완벽을 꿈꾸는 '성실과 노력'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백의 무한대의 '정신적 자유'와 두보의 완벽을 향한 '성실과 노력'의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이백은 아버지가 상인이었다. 그리고 본인은 젊어서 도교에 심취해 산중에서 지낸 적이 많았다. 상인은 속성상 독립을 추구한다. 그리고 도교는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한다. 상인의 독립추구 정신과 도교의 개인 중시 사상이 '정신적 자유' 추구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두보는 학자·문학자 집안이었다. 멀리로는 진대(晉代)의 유명한 학자인 두예(222-284)를 조상으로 두었고, 가까이로는 당나라 초기 시인인 두심언(648?-708)을 조부로 두었다.

글을 가까이 하는 집안이었던 만큼 두보는 어렸을 때부터 시를 잘 지었고, 이런 배경은 자연스레 문학적 완벽을 추구하는 '성실과 노력'으로 연결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인 배경 말고 두 사람의 시풍 차이를 가져온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바로 가장 큰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자연적, 그리고 역사적 환경이다.

중국 대륙은 진령(秦嶺)산맥과 회수(淮水)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그 특성을 구분한다. 바로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과 양자강(장강)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이다. '회남자'에서는 '귤을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로 바뀌고, 구관조와 고니는 제수를 건너지 못하고, 담비는 문수를 건너면 죽어버린다. 이는 정해진 속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성실과 노력의 전형 두보



맹자는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기가 달라지고 어떻게 봉양하느냐에 따라 몸이 달라지니, 참으로 중요하구나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과 북이 토양과 기후가 다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성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남방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낭만적인 성격을 많이 띠는데 반해 북방은 소박하고 실제를 중시하는 성격을 지닌다. 이런 남방과 북방을 대표하는 사상은 도가와 유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노자와 공자가 있다. 노자(?-?)는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에서 태어났다.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남방 세력을 대표했던 초나라를 사상 형성의 배경으로 한 만큼 도가의 중심사상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공자(BC551-BC479)는 춘추시대 노나라(지금의 산동성)에서 태어났다. 북방문화의 중심인 황하의 하류지역을 배경으로 한 만큼 유가의 중심사상은 현실의 질서를 중요시하는 인(仁),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인문경영 작가&강사·경영학 박사

※출처: 신동기 저 '오래된 책들의 생각'(2017, 아틀라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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