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이 여러 왕이나 제후를 다스리는 서양 최초의 국가였고, 그런 로마제국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카이사르라는 인물이었다. 로마의 역사는 사실 '예수 이전'(BC: Before Christ)과 '예수 이후'(AD: Anno Domini '그리스도의 해')로 나누는 것보다 '카이사르 이전'과 '카이사르 이후'로 나누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카이사르 이전 로마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라틴족'의 '국가'였다면 카이사르 이후는 '다민족'의 '3대륙 제국'이었고, 카이사르 이전 대외정책이 '확장 일변도'였다면 카이사르 이후는 '현상 유지'였으며, 카이사르 이전이 '공화정'이었다면 카이사르 이후는 '제정'이었다.
동양엔 진시황제 서양엔 카이사르
또한 서양의 '문화'가 BC20c 미노스의 미노아 문명과 BC16c 페르세우스의 미케네 문명에서 시작되었다면 서양의 정체성은 카이사르의 유럽 대륙 정복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카이사르 이전 유럽에 '각 민족의 신화'가 존재했다면 카이사르 이후는 '유럽의 공통 고대사'가 전개되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에 대해 "그는 갈리아 지방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르면서 10년 동안 무려 800개의 도시를 점령했으며 300개의 나라를 무찔렀다. 그래서 300만명의 적과 싸워 100만명을 죽이고 100만명을 포로로 잡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인물이 10년간 800개 도시를 점령하고 300개의 나라를 무찔렀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그러나 사실 카이사르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의 프랑스 땅인 갈리아 지역 정복뿐만 아니라 브리타니아(영국), 에스파냐(스페인, 포르투갈) 정복활동을 비롯해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 등의 지역을 로마의 속주 내지는 동맹국으로 확정지었다.
한 마디로 유럽에서 당시 사람이 생활하기 힘든 동유럽의 삼림지역과, 북아프리카 이남의 사막지역을 제외한 지중해 세계 전체를 로마의 영역으로 확정지었다.
BC2c 동양에 진시황제가 있었다면 BC1c 서양에는 카이사르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 자체가 훗날 보통명사인 '황제'가 되는 영광을 입은 카이사르였지만, 살아 생전에 진시황제와 같이 공식적으로 황제라는 전제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은 누리지 못한 인물이 또 카이사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르기를 끝내 망설였다.
그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공작을 꾸미고 있던 사람들은 로마의 신탁집에 있던 예언을 들먹이며, 로마는 왕의 통치를 받아야만 파르티아를 정복할 수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그들은 알바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카이사르를 왕이라고 떠받들며 맞아들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일을 불만스러워 하리라는 것을 짐작한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내 이름은 왕이 아니라 카이사르요"라고.
플루타르코스가 남기고 있는 것처럼 카이사르는 절대자가 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로마인들의 왕정시대(BC753-BC509)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간절했던 절대자 끝내 오르지 못해
왕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바로 동일한 자유인인 로마 시민이 주인과 노예 관계로 갈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증오해 로마인들은 절대군주제인 왕정을 무너트리고 1년 임기 두명의 집정관을 정점으로 원로원, 민회라는 삼각체제의 공화정을 선택했다.
그런데 어느 한 시민이 큰 성과를 이루었다 해서 그를 절대자로 떠받들고 공식적으로 그에게 그런 지위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다시 왕정으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상황을 로마시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절대자의 자리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차마 그 자리를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카이사르의 입장이었다.
/인문경영 작가&강사·경영학 박사
※출처: 신동기 저 '오래된 책들의 생각'(2017, 아틀라스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