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씨네코뮌 <2>VHS의 귀환 - 전남매일
김지하의 씨네코뮌 <2>VHS의 귀환
김지하의 씨네코뮌

김지하의 씨네코뮌 <2>VHS의 귀환

시대의 정서 담아내는 문화적 아카이브
문화소비 추억 속 ‘레트로’ 유행
미국 비디오 대여점 관광 명소 부상
아시아 최대규모 츠타야 VHS 대여
비디오 모르고 자란 20대도 유인
‘그곳’에 존재하는 작품 대면 쾌감

필자가 일본에서 구입해 온 DVD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 장 외스타슈의 ‘엄마와 창녀’, 미카엘 하네케의‘피아니스트’.
운이 좋게도(?) 필자는 20대 초반을 일본에서 보냈다. 그 당시 일본, 특히 도쿄는 경제 버블로 인한 침체기를 막 지나 예술문화가 안정적인 부흥기를 예고하던 시기였다. 필자가 운이 좋았다(!)는 것은, 일본이라는 공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개인적으로 영화와 음악에 가장 열정적이었고, 그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았기 때문이다.

주요 역마다 대형 비디오, 대형음반 체인인 타워레코드 혹은 HMW, 버진(Virgin) 등이 있었고, 그 사이의 작은 역 주변을 조금만 걷다 보면 중고음반가게와 중고서점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중심가에서 전철로 40분 정도 걸리는 그리 크지 않은 동네에 살았지만, 역에서 내려 집에 도착하기까지 츠타야(TSUTAYA)를 지나 중고 LP가게, 중고 CD가게, 독립서점을 차례대로 지나가는 동선이 가능했다.

당시에는 굳이 LP를 사지 않아도 골목을 지나치는 것만으로 온몸으로 문화를 소비했다는 희열감 같은 것이 있었다. 가장 마지막 코스인 독립서점은 사장님이 선별한 책과 함께 각종 피규어를 파는 곳이었다. 책은 대부분 소설이었는데, 그 중에는 미국 비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의 원서들과 번역된 책들이 있었다. 꽤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던 피규어 때문에 상대적으로 너무 싸 보인 책들을 얼떨결에 사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잭 케루악’과 ‘찰스 부코스키’를 알게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즐거웠던 건 츠타야 덕분이다.

지금은 서점으로 더 유명하지만, 당시의 츠타야는 대형 비디오 대여 프랜차이즈라는 인식이 강했다. 물론, 츠타야에는 비디오테이프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CD와 게임디스크도 같이 대여하고 있었지만, 물량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고가게에서 사는 것이 이득인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 이전까지의 영화들, 앤디 워홀 작품을 비롯한 아트 필름들, 마야 데렌부터 당시 독립영화계의 기수였던 할 하틀리의 단편모음집 등을 모두 이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아 햄버거 체인점 모스버거에서 두 달 동안 아르바이트하여 VHS 복사용 비디오 플레이어(VCR) 두 대와 영구소장용 VHS를 보관할 목적으로 조그만 냉장고를 구입했다. 츠타야는 매달 셋째 주쯤 1주일간 무조건 모든 VHS를 100엔(한화로 약 1,000원)에 대여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고, 그 주에는 매일 오픈 시간에 맞춰 잔뜩 챙겨와 틈날 때마다 복사를 했다. 또 복사한 영화들 안에서 좋아하는 장면들만 부분적으로 또 복사해서 자기 전에 틀어놓고 잠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같은 건데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2000년이 되자 츠타야도 조금씩 DVD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DVD 플레이어도 새로 사야 하는데 복사도 안 되고, 갖고 싶으면 구매하라는 태도가 불쾌했다. VHS도 따라하는 듯 복사방지기능을 달고 나오기 시작했으나, 복사방지를 방지하는 법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DVD의 맛을 알아버렸고, 책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얇고 훨씬 가벼우며, 감독과 배우가 직접 코멘터리까지 해주는 보너스에 무너져버렸다. 필자가 제일 처음 구매한 DVD는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로 당시 한화로는 6만 원 정도로 매우 비쌌다. 밀레니엄 시대는 영화도 사치품으로 전락하는 것인가 슬퍼하여, 영화는 DVD로 보고 그중 좋았던 건 VHS로 다시 빌려 복사하는 모순된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렇게 몇 년 더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방 안에 꽉 차 있던 복사테이프들을 거의 다 버리고 와야 했고, 며칠 동안 고르고 또 골라서 추린 200개의 복사테이프와 3종의 DVD를 가지고 들어왔다. DVD는 앞서 말한 ‘피아니스트’, 장 외스타슈의 ‘엄마와 창녀’, 그리고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중에 처음으로 DVD로 발매한 ‘영화사’ 4장짜리 세트다. 고다르의 ‘영화사’는 자그마치 나의 1년 치 비디오 대여값과 한국으로 가는 항공권보다 비쌌지만 돈만 있었다면 두 개도 샀을 거다.

한국에 돌아오니 여전히 보고 싶은 영화들을 비디오점에서 만나는 건 어려웠지만, 토렌트라는 온라인 세계가 활성화되어 있었고, 3일 동안 다운로드를 기다리는 인내만 있으면 무료로 뭐든 볼 수 있었던 시기를 지나 시간만 나면 수십 편 볼 수 있는 세상까지 왔다.

전 세계적으로 레트로가 유행하면서 최근 2~3년 동안 비디오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먼저, 미국의 대표적인 비디오 대여점인 ‘블록버스터(Blockbuster)’에 관한 소식이다. 1985년에 텍사스주 달라스점을 시작으로 9,000개 이상의 매장을 보유하던 미국 최대 비디오 대여점 ‘블록버스터’를 파산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넷플릭스(Netflix)’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넷플릭스에서는 현재 남은 마지막 블록버스터 대여점인 오레곤 주 밴드점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마지막 블록버스터(The Last Blockbuster)’(2000)와 드라마 ‘블록버스터 살리기’를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 밴드점은 2020년도부터 에어비앤비(숙박 공유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비디오점에 대한 향수를 밤낮없이 하루 동안 맘껏 즐길 수 있는 이벤트로 화제를 모으며, 미국의 마지막 남은 비디오 대여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전국적인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에어비앤비 서비스 중인 블록버스터 밴드점(출처 CNN)
또한, 영국영화협회(BFI)에서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 BFI 사우스뱅크에서도 2019년 여름,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주제로 90년대 비디오 대여점을 재현한 팝업스토어를 열어 90년대 영화를 특집으로 상영한 바 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비디오 대여점이었던 ‘츠타야’는 2020년 9월, 젊은층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시부야점을 다시 새롭게 개장했다. 지하 2층 지상 7층 규모의 츠타야 시부야점은 “일본 최대 규모의 영화박물관”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20만 개의 영화작품들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곳이 최근 화제가 된 것은 압도적인 물량이 아니라, VHS를 다시 끄집어내어 비디오 플레이어(VCR)와 함께 대여 서비스를 개시한 데 있다. 츠타야 시부야점에서는 약 7,000개의 VHS를 제공하고, DVD나 OTT로 제공되지 않는 작품 약 2,000개를 별도로 모아 ‘시부야필름컬렉션’으로 소개하고 있다.

츠타야 시부야점 시부야필름컬렉션 코너(출처 TSUTAYA)
일본영상소프트협회에서 제정한 ‘비디오의 날(11월 3일)’이 들어있는 일주 동안은 예전처럼 VHS를 모두 100엔에 대여해주는 이벤트도 부활했다. VHS 대여서비스를 시작하고 한 달 동안 집계한 대여 순위는 더욱 놀랍다. 1위는 장 외스타슈 감독의 ‘엄마와 창녀’(1973), 2위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랭보 역을 맡았던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토탈 이클립스’(1995), 3위는 하프 포스터 감독의 디즈니 영화 ‘남부의 노래’(1946), 4위는 실험영화 감독 파트릭 보카노프스키의 ‘천사’(1982), 5위는 체코의 거장 베라 히틸로바 감독의 ‘데이지’(1966)로, 25년도 전에 비디오점에서 대여 차례를 몇 번씩 기다려야 했던 리스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VHS 대여서비스를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대여하는 주 고객층이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는 점이다. 비디오를 보고 자라지 않은 젊은층을 유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레트로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VHS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들이 포함되어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OTT의 등장으로 인해 보고 싶은 작품은 모두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수십 수백만 작품 가운데 정말 보고 싶은 작품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VHS는 대중적인 소구력은 없을지 몰라도 그곳에만 존재하는 작품을 대면하는 쾌감이 제공된다. 마지막으로, 정보의 원천이자 상상력의 원천인 비디오 케이스를 볼 수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디지털 과도기인 당시에는 작품설명과 스틸이미지, 홍보 마케팅 문구까지 작품에 대한 모든 정보가 비디오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이목을 끄는 문구와 작품설명, 스틸이미지가 집적되어있는 비디오 케이스는 그 자체로 상상 속에서 작품을 대면하는 순간을 제공한다.

ACC 기획전시 ‘원초적 비디오 본색’ VHS 전시공간
지난해 11월말 추위가 찾아들 무렵에 시작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의 비디오 전시 ‘원초적 비디오 본색’도 계속되는 한파와 폭설에도 불구하고 새해가 시작함과 동시에 관람객이 2만명을 돌파했다. OTT 구독 서비스가 일상화되면서 VHS는 소멸된 매체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최근 다시 소환되고 있는 VHS를 보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격하게 전환되던 시기에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준 일상문화적 매체로서 VHS가 지닌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VHS는‘매개’라는 문자 그대로의 미디어 기능을 충실하게 담아낸 매체이자 시대의 정서를 담아내는 문화적 아카이브로 새롭게 재평가 받고 있다.

/김지하 홍익대 미술학 박사·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관

ACC 기획전시 ‘원초적 비디오 본색’ VHS 열람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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