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부대 만행 촬영…힌츠페터 등에 전달 전세계 타전 기여
기획

공수부대 만행 촬영…힌츠페터 등에 전달 전세계 타전 기여

광주여성가족재단·전남매일 공동기획-길에서 만나는 광주여성 100년의 역사
⑭ 허마르다-5·18의 진실을 알리다
80년 당시 광주 참상 현장 촬영
검열통제 피해 해외에 진실 알려
쫓기던 청년들 피신처 제공 보호

허마르다 부부. 출처=5·18기념재단
1980년 5월 17일 오후. 허마르다 선교사 부부는 광주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에서 주인 잃은 학생들의 가방과 신발, 옷가지 등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지고 쫓기던 시민들을 사진에 담고 참담한 마음으로 사택에 돌아왔다.

잠시 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가슴을 안고 나가보니 20여 명의 학생이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숨겨줄 것을 간청한다. 그때 광주 양림동 선교부 사택에는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됐고 서너 가구만이 살던 때다. 이들은 허마르다 선교사 사택에 오기 전 이미 다른 선교사 사택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곳에서는 “만일 경찰이 수색하러 온다면 우리 집에 당신네들이 있다는 것을 없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답을 들었기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며 자신들을 숨겨줄 것을 간청했다.

허마르다 부부는 “정의를 위해 기꺼이 거짓말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들을 자신의 사택에서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허마르다 선교사 사택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도피처’가 됐다. 군부의 감시와 위협에도 광주시민들을 보호하는데 자신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힘을 다했다. 평범한 복음 사역자들이던 부부는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겪게 되면서 정의의 편에 섰게 됐다. 허마르다 선교사 사택이 역사적으로 조명을 받게 된 계기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다.

허마르다의 가족. 출처=‘제니의 다락방’


● “군인이 시민에게 총을 쏘다니….” 광주진실 알리기 앞장

허마르다 부부는 자신들이 섬겨온 도시 광주에서 군부가 자국의 시민을 향해 학살하는 믿기 힘든 광경을 지켜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광주기독병원은 총상 환자들로 넘쳐나 병실을 가득 채우고 복도와 현관 바닥까지 넘쳤다. 방금 전에 지원 차량에서 시민들에게 헌혈해 줄 것을 호소하며 외치던 여고생이 총격을 당해 싸늘한 시신으로 되돌아온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결심을 한다.

남편 허철선 선교사는 1980년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실장으로 ‘오월 광주’를 목격하고 겪으면서 참상의 현장을 촬영했고, 허마르다가 글을 작성해서 지인들을 통해 광주의 진실을 해외에 알렸다. 군에 의해 사진을 번번이 빼앗기자 사택의 차고를 개조해 암실을 만들어 직접 사진을 인화해 고립된 광주 5·18 진실을 미국과 독일, 세계로 전송했다. 당시 계엄군의 폭력에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의 모습이나 시신이 안치된 현장을 잡은 사진들이었다. 이 사진들은 영화 ‘택시 운전사’ 속 실존 인물인 주인공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피터를 비롯한 외신기자와 해외 선교사들에게 전해져 전 세계에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데 기여한다.

위르겐 힌츠피터가 광주에서 머문 곳도 바로 허마르다 선교사의 사택이었다. 허마르다 사택은 당시 어떤 언론도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던 광주의 실상을 문서로 담는 편집실로, 참혹한 현장의 사진들을 인화하는 암실로 사용됐다. 광주의 진실을 담은 결정적 증거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자료들은 후에 거짓 보도됐던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반면 5·18 기간 동안 광주지역의 신문기자들은 진실 보도를 위해 몸부림쳤으나 계엄사령부에서 지시하는 관제소식만으로 지면을 채워야만 했다. 계엄사령부의 승인 없이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실을 수없었기에 계엄군의 유혈 진압 실상을 보도하지 못한다.

이에 자책감을 느낀 당시 전남매일 신문기자들은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고 군부에 저항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어느 누구도 진실의 보도를 할 수 없었던 일을 허마르다가 해냈다. 허마르다 노력은 한국 정부 검열과 통제를 피해 해외에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중요한 통로가 됐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니의 다락방’ 책 표지


● 선교사로서 활약

허마르다는 선교사이자 교회사가이며 기자 출신으로 1941년 5월 6일 미국 북캐롤라이나주 샬롯에서 태어났다. 콜럼비아대학교 버나드 칼리지에서 미국학을 전공하고 퀸즈대학에서도 공부했다. 미국의 유명 칼럼니스트 해리 골든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58~1962년 ‘Charlotte Observer’지의 신문기자로 활동했기에 사진 촬영과 기록에 능숙했다.

1962년 남편 허철선(찰스 베츠 헌트리)목사와 결혼한 후 함께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1965년에 한국에 파송됐고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순천 선교부에서 1년간 사역했다. 1969년부터 광주 선교부에서 남편과 함께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1985년 귀국할 때까지 다양한 사역에 전념했다. 남편 허철선은 광주기독병원 원목과 호남신학대학 상담학 교수로 봉직하며 사역했고 허마르다 선교사는 매주 월요일 저녁 광주 젊은이들을 위한 영어 성경 공부반 ‘먼데이 미팅’을 본인의 선교사 사택에서 열었다. 1969년 가을부터 시작해 1984년까지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다. 호남신학대학교,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대건신학교(가톨릭), 삼양타이어, 매산고등학교 등에서 영어 교사로도 활동했으며 신문기자로 활동한 경력으로 코리아 타임즈(Korea Times)와 코리아 헤럴드(Korea Herald) 등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한국사회와 문화에 대한 기고문을, 미국 남장로교 월간지인 ‘The Presbyterian Survey’에도 많은 기고문을 남겼다. 이런 경력을 바탕삼아 1980년 5월 광주 상황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됐다.

결혼 후 미국에서 첫째 딸(Mary Lanier)을 낳고 둘째 딸(Susan Lynn)은 서울에서, 아들(William Michael)은 광주에서 한국 아이를 입양했으며 셋째 딸(Jennifer Reid)은 광주에서 낳았다. 1984년 한국선교회의 철수와 함께 허마르다 선교사 부부는 선교사 사역 기한 20년을 채운 뒤 한국에 계속 머물기를 원했지만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다는 일련의 행적을 이유로 1985년 강제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간 후 목회에 협력한다.

허마르다는 미국에서 도서관 연구 사서로 활동했고 2009년 한국에 전래된 개신교가 한국에 끼친 영향과 한국사회에 선교사들이 이룩한 큰 변혁을 다룬 내용의 책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를 출판했다.

5·18 부상자 사진. 출처=5·18기념재단
5·18 부상자 사진. 출처=5·18기념재단
● 남편 허철선 선교사, 임종 전 “광주에 가고싶다, 광주에 묻히고 싶다”

허마르다 선교사 부부는 5·18민주화운동 이후 강제 추방돼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십자가의 도시 광주’를 잊지 못했다.

오월어머니회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여한 인물들에게 수여하는 ‘오월어머니상’을 2017년 제11회 수상자로 허마르다 남편 허철선 선교사를 선정했다. 2017년 6월26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미국 로스캐롤라이나주 자택에서 별세한 허마르다 남편은 생을 마감하기 전 가족에게 “광주에 가고 싶다. 광주에 묻히고 싶다”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광주를 사랑했다. 남편 유언에 따라, 허마르다와 유족이 화장된 유해 일부를 안고 와서 ‘제2의 고향’인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대학 선교사 묘지에 안장하며 부부의 광주에 대한 사랑을 보여줬다.

2018년 5월18일 제38주년 5·18 기념식에 참여한 허마르다는 남편 허철선 목사에게 ‘광주에 잠든 헌트리에게’라는 편지글을 낭독하며 광주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때 엄마 허마르다와 함께 광주를 방문했던 셋째딸 제니퍼(한국 이름은 제니)는 1980년 광주 양림동산 선교마을에서 살았던 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기억을 살려 ‘제니의 다락방’이란 책을 출간한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푸른 눈의 미국인, 당시 10살의 주인공 제니가 목격한 광주의 오월을 일기형식으로 적은 회고록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광주의 오월’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동화다. 광주에서 태어났고 1980년 오월 양림동 선교마을 사택에서 부모님과 함께 다락방에 시민과 학생들을 숨겨주고 무사히 지켜냈던 일, 공중에서 헬기들이 총을 쏘아대고,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락방에서 숨죽이던 악몽보다 더 무서웠던 기억들, 고양이 오월이의 기억들, 10살의 제니는 5·18을 그렇게 기억했다. 단순히 무섭고 슬픈 역사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담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전달해 준다.

이처럼 ‘제니의 다락방’은 5·18민주화운동을 되새기고, 다음 세대에게 그 정신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유대인 학살을 피해 은신처에서 생활하며 전쟁의 참상과 피난 생활의 어려움,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적었던 ‘안네의 일기’처럼 역사의 교훈을 남기게 한다. 제니는 광주집에 들렀을 때 아빠와 함께 어렸을 적에 마당 한쪽에 심었던 은행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난 것을 보고 은행나무의 형상이 마치 아빠가 제니를 품에 안아주는, 자신의 모습과 같다고 말하면서 눈물짓고 아빠를 그리워했다.

허마르다 선교사 사택.


● 북한 개입설 “명백한 거짓 주장” 반박

허마르다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국회, 5·18 기념행사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2019년 5월 17일 5·18기념재단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일부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5·18 북한개입설을 제기했을 때 직접 나서서 대한민국 국회의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5·18에 대한 허위사실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 주장이 명백한 거짓이라고 항의했다. 또 “한국 국민이 한국 국회를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국회에 당부하기도 했다.

허마르다 선교사는 언론인으로서 진실을 추구하고 알리는데 사명감을 다했다. 1980년 당시 타임(TIME)지에 ‘빨간 깃발을 꽂은 차량에 탄 광주 젊은이들의 사진’이 실려 해외에서 좌익의 소행이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사진에 대해서도 허마르다는 타임지에 편지를 보내 그 차량이 광주기독병원에 피가 부족해 헌혈을 돕던 차량이었음을 증언하고 오보를 정정한다. 단순히 사실 전달을 넘어 잘못된 정보에 맞서 진실을 옹호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박한 것.

30년 경력의 해외언론인 출신인 허마르다는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람들은 기자들이라면서 “진실과 정의는 기자들의 손에 달려있다. ‘한국 내 언론 자유를 바라며 항상 기도하겠다. 오직 진실만을 보도하십시오’ 라고 당부하면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허마르다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린 생생한 증인이자 기록자로서 총성과 죽음이 오가는 도시에서 자신이 섬겨온 도시 광주사람들을 끝까지 놓지 않고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진정한 ‘광주사랑’을 실천했다. 5·18민주화운동이 단순히 국내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의 중요한 사건임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허마르다의 증언과 기록은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에 포함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5·18 진상규명 및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용기, 사랑, 책임감, 경계를 넘어선 연대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반응하고 연대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허마르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한다. 용기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존경을 받는 이유다. 허마르다 활동은 광주시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줬으며 5·18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허마르다의 헌신은 5·18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광주 양림동산에는 허마르다선교사 사택과 암실을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며 그들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광주의 역사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임선미 광주여성길 역사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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