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대문부인병원 의사와 간호사. 적극적이고 주체적이었던 현덕신은 일본 귀국 후 조선총독부의원의 원장을 찾아가 자기를 소개하고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조선총독부의원을 거쳐 1923년부터 동대문부인병원으로 옮겨갔다. 첫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현덕신이다. 출처=현덕신 평전 |
무궁화 다섯장 꽃잎 가운데 붉은 중심이 홍단심(紅丹心)이다. 단심(丹心)이란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뜻한다. 앞사람이 걷고 뒷사람이 따라 걸으면서 광주를 지켜왔던 선배 여성들의 발자취를 기억하는데 좋은 이름이다. 이들은 개화기 광주 마중물이 돼 줬다. 홍단심길은 독립을 도모하고 여성의 힘을 사회에 드러내면서 교육과 육아와 여성 자신을 돌보는 애국·애민·홍익인간의 마음이 촘촘히 배어 있는 ‘광주정신 여성의 길’이다.
![]() 현덕신 병원 앞의 현덕신(가운데). 현덕신은 1949년 병원 안에 신생유치원을 설립했다. 주소는 광주 동구 남동 40번지다(현재 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문화원 자리). 출처=현덕신 평전 |
●장재성·장매성 남매 빵집, 학생독립운동 아지트
여정의 시작은 ‘장재성 장매성 남매의 빵집’이다. 이곳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제1거점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 간 충돌로 패싸움이 계기가 돼 일어난 우발적인 일이었고 말하는 이가 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에 어떻게 1929년 11월 3일부터 1930년 3월까지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계속됐으며 전국 194개교가 참여하고 5만4000명의 학생들(당시 전국 학생의 약 60%)이 참여한 3·1운동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이 될 수 있었겠는가.
역사학자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자’가 어떻게 정적인 사회를 동적인 상태로 변모시켜 사회가 문명을 성장시키는가를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밝힌 바 있다. 1929년 독서회와 ‘장재성 장매성 남매의 빵집’은 토인비의 창조적 소수자였다. 장재성은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 재학 중에 동창 왕재일·최규창과 함께 비밀조직인 ‘성진회’를 결성해 항일운동을 했다. 고보졸업 후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장재성은 ‘장재성 빵집’을 열고 이곳을 성진회 해산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핵심 기구가 된 독서회중앙본부 연락 및 비밀 모임 장소로 활용했다. 장재성 여동생 장매성 또한 자신이 다니던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에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를 ‘소녀회’라 불렀다. 1929년 11월 광주여고보는 앞장서 싸웠다. 이들은 민중 속에 잠재된 거대한 항일의 물줄기를 퍼올리는 마중물이 됐고 역사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 기억하고 있다.
![]() 광주의 부호 최명구가 회갑을 기념해 1만원을 기부, 800여평의 부지에 흥학관을 지어 지역사회에 기증했다. 1929년 9월 10일 조선청년총동맹전남연맹이 정기회의를 개최하고 흥학관을 배경으로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출처=광주전남독립운동사적지 |
●광주 최초 여성 의사 현덕신, 사회복지 기틀 마련
두 번째 만남은 근대 광주 태동기의 독립운동가, 여성 슈바이처 현덕신 원장(1896~1963)이다. 그녀는 ‘현덕신병원’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내건 광주 최초 여성 의사였다. 흐트러짐이 없는 단정한 옷매무새와 단아한 단발머리의 소유자 현덕신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에 평양정명학교에 교사였을 때 의료선교사인 로제타 홀이 의학 공부를 제안했다. 조선의 여성들은 남성 의사에게 신체 일부를 보여주는 것을 수치스러워했기 때문에 여성 의사가 되는 것은 여성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현덕신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 공부만 했던 게 아니었다. 재학시절 2·8독립선언 준비를 위해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해 일제의 1급 요시찰 대상이 됐다.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그는 1923년 동아일보 기자였던 최원순과 결혼 후 남편의 고향 광주로 내려와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개업했다. 현덕신은 산모와 신생아 건강을 위해 힘써 오면서도 조국 광복과 발전을 위해 여성 참여와 계몽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광주YWCA 회장직 수행, 근우회 광주지회 설립 등을 통해 여성의 활동을 조직화하고 수행하는 일에 봉사했다. 개인재산을 털어 신생유치원을 설립(1948)해 그의 아들 최상옥·정근(‘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의 작곡자)과 함께 유아교육에 힘썼다. 신생보육학교를 세워(1951) 보모, 교사 양성의 길을 닦기도 했다. 여성들과 전쟁고아들을 돌봐줄 건강과 교육에 대한 사회복지 기초의 틀을 만들어 낸 여성 지도자였다.
![]() 홍단심길 |
●민족계몽운동 선도 소셜 디자이너 김필례 교장
세 번째로 만날 사람은 희망없던 시절 등불이 됐던 김필례 교장(1891~1983)이다. 그는 요즘 말로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였다. 김필례는 정신여학교,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교장 등을 맡아 평생 후학을 가르쳤던 교사였다. “배운 만큼 달라야 하고, 믿는 만큼 달라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실천했다. 그의 꿈은 주체의식을 가지고 사회와 나라를 위해 봉사할 여성을 키우는 일이었다. ‘흥학관’ 여성야학에서 여성들을 가르치며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의 숨은 저력을 양지로 끌어냈다. 그는 YWCA를 창설해 학교 밖에서도 민족의식 교육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을 기획했다. 1919년 광주 자택(서석의원)에서 복사해 서울로 가지고 간 2·8독립선언문이 3·1 운동 도화선이 된 것도 사회운동가로서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김필례는 3·1만세운동 참가와 신사참배 거부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지만 평생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 현덕신. 출처=국가보훈처 |
●여성 독립운동·사회적 변화 이끈 동아부인상회
김필례가를 돌아 나오면 ‘동아부인상회’가 있었다. ‘동아부인상회’는 1910년에 기혼 여성(婦人)으로 결성된 조직이었으며 광주 여성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중심 역할을 했다. 주력 사업은 부인들이 주로 필요로 하는 가정용품과 책, 학용품 등 소비재를 공동 구매해 판매했다. 충장로는 광주읍성시대에 남문과 북문을 잇는 대로였고 현재도 격자모양 구도심의 뼈대다. 서울에 명동이 있다면 광주에는 충장로가 있다. 광주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로 “우다방에서 만나요”가 있다. 우다방은 ‘충장로우체국’을 말한다. 우다방 정문 층계에 앉아 있노라면 봄을 만날 수 있다. 3·1만세운동 때 수피아여학교 학생 윤형숙이 왼팔을 순사에게 잘리면서도 “나는 조선의 혈녀다”라고 외치며 항일독립만세 의지를 꺾지 않았던 길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때는 태극기와 격문을 뿌리면서 충장로우체국을 돌아 최종목적지인 일제 경찰서까지 행진했던 항일의 길이다. 이런 붉은 단심의 중앙길인 충장로 끝자락에 흥학관이 있다.
![]() 금남로 공원에 세워진 장재성빵집과 김기권문방구점 옛 터와 표지석. 1929년 비밀결사조직 성진회의 핵심인물이었던 장재성이 독서회 운영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김기권 등이 출자해 소비조합을 설립. |
●정율성 모친 최영온, 4남1녀 자녀들 독립운동 헌신·교육
홍학관은 1920년대 광주 문화복합공간이자 광주학생독립운동 제2거점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독서회와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가 종의 축으로 작동했다면 흥학관이 횡의 측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1920~1930년대 광주 청년단체 활동들이 이곳에서 이뤄졌으며 선각자 선배들의 강연과 만남을 통해 민족자결의식을 키우고 서로의 연대와 소통을 했다.
특히 ‘여성야학’과 ‘노동야학’이 흥학관에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광주정신’의 기반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5·18민주항쟁’이라고 본다면 다른 어떤 흔적보다도 광주의 심장이었던 흥학관은 복원돼야 할 최우선 장소다.
그렇게 걷다 보면 광주천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때 작은장터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광주 3·1만세운동의 첫 포효 ‘대한독립 만세’가 터져나왔다. 강둑 위에서 50m 떨어진 곳에 ‘신문잡지종람소’가 있었다. 이곳은 광주3·1만세운동에서 조직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작은장터는 한말의병장 기삼연 대장이 공개 처형된 곳이다. 바로 이 주변에 ‘최영온’의 집이 있다. 최영온은 4남1녀를 두었는데 자녀(막내가 정율성) 모두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치도록 키웠다. 최영온의 큰 오빠가 오방 최흥종이며 둘째 오빠가 김필례 남편 최영욱이다.
홍단심길을 걸으면 광주를 의(義)향으로 땀땀이 엮어줬던 선배 여성들의 열정에 감동할 수밖에 없다. 광주가 인권과 정의의 아름다운 품위를 갖추게 된데는 광주 여성의 ‘붉은 한 마음(홍단심)’이 있었기에 가능하게 됐다. 이 좋은 봄날 모두가 홍단심이 돼 이곳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피워보면 어떨까.
강지나 광주여성가족재단 여성역사문화해설사·광주동구 인문산책로 문화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