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간 광주의 518은 성역이었고 불가침 영역이었다. 때문에 광주에서 518과 관련된 지적이나 비판적인 언급은 어떠한 경우에도 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여겨졌고 선출직 정치인이라면 더욱 손 대면 안 될 영역이었다. 무릇 정치는 100명의 편을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전략적이라고들 하니 말이다.
그렇게 광주에서 43년 전 5월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섣불리 언급할 수 없는 달이 되고 있었다. 어쩌면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공감은 추모에 동참하는 것뿐인 선배 세대의 숭고한 희생으로만 기억되는 역사가 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518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편성된 시청 부서와 예산 역시 심의하기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정치에 입문한 젊은 세대의 눈에 보인 518의 현주소였다.
물론 43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광주는 채 아물지 않아서 그럴 법도 하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초상집이었던 역사를 겪고도 책임지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고 최초의 발포 명령은 누구로부터 나왔는지, 어디서 집단 학살이 이뤄졌는지, 누가 사망했고 행방불명되었는지 등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가 많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이 진상규명은 점점 후배 세대의 몫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배들이 추구한 목표와 같은 목표, 같은 사명감으로 약 두 달간의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릴레이 5분 발언의 구성원 모두 이 사안을 더 면밀히 검토하고 세심하게 접근하자 다짐했다. 다섯 명의 5분을 모았지만 25분은 몹시 짧아 보다 더 경제적으로 활용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누군가를 절대악으로 비춰지게 해서는 안됐다.
또한 추측이 아닌 팩트로 설득력을 가져야 했으며 이 모든 준비과정은 어떤 이해관계도 개입되지 않도록 비밀에 부쳐야 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라는 릴레이 5분 발언이라 입장과 퇴장하는 동선까지도 회의하고 연습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5월 11일 길고도 짧은 25분의 발언은 많은 분들의 격려와 공감이 함께했다. 특정 인물이나 단체에만 책임을 묻는 공격성 발언도 아니었고 발언자를 돋보이게 만드는 발언도 결코 아닌 518의 숭고한 가치만을 위한 발언을 해냈다. 물론 몇몇 분들로부터 우리와 함께 따로 이야기하면 될 것을 왜 공론화까지 시켰냐는 비판적인 조언도 받았다. 그러나 앞서 적은 이유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발언 후 3주 정도 지난 지금도 ‘응답하라1980’ 팀은 현재 진행형이다. 일련의 발언 속 등장한 기관과 단체를 차근차근 만나 함께 공론의 장으로 나와 같이 발전적인 방향을 찾아가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발언 속 ‘누구의 것이냐.’라는 질문의 뜻이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였다는 맺음을 위해 발언 이후로도 노력하고 있다.
왜 그렇게 간절하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필자는 1980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스물여덟 살 박관현 열사와 같은 나이에 같은 직책을 역임한 41년 후배 총학생회장이었다. 늘 책과 자료에 나온 그분의 발자국을 보며 활동했다.
또 발언의 한 구성원은 관현장학재단의 장학생으로 공부하며 정치인의 꿈을 키웠고, 한 구성원은 민변 출신으로 국가폭력에 대한 소송을 담당한 적이 있다.
응답하라1980 릴레이 5분 발언에 나선 젊은 의원 모두 직접 80년 5월을 겪지 않았지만 각자 삶에 80년 5월은 큰 획을 그었다. 우리에게 교과서였고 나침반이었고 현재진행형인 518이 앞으로 전해지는 가치와 방식까지도 정의롭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임진왜란이 이순신 장군의 것이 아니고 동학농민혁명이 전봉준 장군의 것이 아닌 것처럼 518 역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역사이자 국민 모두의 것, 더 나아가 세계시민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시민들이 만들어주신 젊은 의원들이 그 당찬 시작을 알렸다. 이제 이 담대한 걸음에 광주시민 모두가 함께해주시라 부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