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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무대’ 베로나서 받은 앙코르 잊을 수 없어요”
넓은 음역대 장점…남도예고·한예종 거쳐 오스트리아로
비엔나 ‘슈타츠 오퍼’ 전속 성악가로 7년간 주역 활약
2008년 프리랜서 전향…내년 영국 코벤트가든 데뷔 앞둬
“경험·인맥 공유…광주 오페라 발전 위해 힘 보태고 싶어”
세계최고 오페라단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슈타츠 오퍼(국립오페라극장)의 전속 성악가로 활동하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약하고 있는 베이스 심인성(41).
여수 출신으로 남도예고(현 광주예고)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1998년 오스트리아로 건너간 그는 수많은 오페라 작품에 출연하며 유럽 오페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 5년만에 광주를 찾은 그를 만났다.
“광주에 계신 부모님과 할머니를 뵙기 위해 왔습니다. 연주 일정 때문에 바빠 혼자 귀국했는데 벌써 5년만이네요. 내년 영국 런던 코벤트 가든 데뷔를 앞두고 잠시 짬을 냈습니다.”
그는 2018년까지 작품 출연 계약이 차 있는 상태였다. 국내 무대에서도 러브콜이 들어오지만 일정상 참여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보수적인 비엔나 슈타츠 오퍼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는 한국인 최초 전속성악가로서 7년을 지낸 그는 세계적인 대가들과 한 무대에 섰다. 플라시도 도밍고, 안나 네트렙코, 안젤라 게오르규, 빌라손 등과 함께 ‘파르지팔’, ‘라 보엠’, ‘돈 조반니’, ‘로미오와 줄리엣’ 등에서 공연하며 경력을 쌓았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도 섰다.
그러던 그는 2008년 안정된 비엔나 슈타츠 오퍼를 나와 프리랜서 성악가로 전향한다.
“노래하는 게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슈타츠 오퍼에서 매일 공연하고, 잦은 연습으로 힘들어지면서 노래하는 행복을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예술가 아닌 기술자란 생각이 들면서 노래가 행복하지 않은게 힘들었습니다.”
그는 노래의 행복이라는 동기부여를 잃어버린 것에 과감한 선택을 내렸다고 했다.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 생각했어요. 자신감 하나로 프리랜서의 길을 걷게 됐지만 두번째 해까진 많이 힘들었죠. 이후 다시 노래하는 행복을 찾게 됐습니다.”
프리랜서로의 첫 무대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극장에서 공연된 베르디 ‘에르나니’ 의 실바였다. 성공적인 데뷔무대를 마치니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는 국내 무대엔 2006년 국립오페라단과 함께한 ‘돈 죠반니’와 2011년 ‘사랑의 묘약’ 등 두번을 섰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우렁찬 소리를 들었던 그는 여수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이태리에서 유학하고 오신 선생님으로부터 처음 성악 레슨을 받았다.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선생님의 권유로 광주에 있는 남도예고에 진학한다.
2남2녀중 막내인 그는 어머니는 성악가의 길을 선택한 것을 기뻐했지만 아버지는 반대하셨다고 했다.
남도예고를 졸업한 후 곧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 그는 최현수, 임웅균 교수를 사사했다. 1996년 제1회 광주 성악콩쿠르에서 1등의 영예를 안으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는 브람스의 가곡 중 ‘네개의 심각한 노래’로 심사위원의 극찬을 받았다. 1등 수상으로 받은 교육지원비가 유학의 발판이 됐다고 했다.
한예종을 졸업하고 1998년 오스트리아로 건너간 그는 2000년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르 국제콩쿠르에서 입상했고, 그 부상으로 2000~2001년 프랑스 C.N.I.P.A.L 국비 장학생으로 활동화면서 마르세이유, 아비뇽을 중심으로 오페라콘서트와 가곡 콘서트를 가졌다.
2003~2004 시즌에 세이지 오자와가 지휘하고 미국 출신 바리톤 토마스 햄프슨이 함께 출연한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로 호평을 받았다.
2004년 미국 L.A.에서 열린 2004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 콩쿠르에서 최종결선에 올라 사르수엘라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오슬로 퀸 소냐 국제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했고, 2008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초청으로 ‘로미오와 쥴리엣’ 중 쥴리엣의 아버지 캐퓰릿 공작 역으로 출연해 인지도를 높였다.
지난 8월엔 로마 원형경기장을 무대로 하는 여름 오페라 축제로 이름난 이탈리아 베로나의 아레나(Arena di Verona) 축제에서 베르디 ‘아이다’의 주역인 이집트 왕 역으로 발탁되며 주목받았다.
그에게도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처음 오스트리아로 건너가서는 언어문제로 적응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언어문제가 많이 힘들었어요. 우울증이 올 정도였죠. 지금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영어, 이태리어, 프랑스어 등 5개어를 퍼펙트하진 않지만 구사할 수 있으니까요.”
세계무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외국에서 동양적 마스크를 가지고 활동하는데 대한 장벽이 있을 것이란 우려가 있었고 실력으로 커버하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실력으로 제대로 평가받고 싶었습니다. 실력으로 신뢰감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음악에 다가가는 두려움과 가장으로서 성공에 대한 무게감도 컸죠. 그런 떨림 때문에 성취감은 더욱 컸던 것 같아요.”
유학간 첫 해에 뇌종양 양성판정을 받아 연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했던 것도 그가 이겨내야 할 어려움이었다. 지금은 완치됐지만 그걸 이겨내고 우뚝 서 새 삶을 살게 됐다고 말했다.
넓은 음역이 장점인 그는 처음엔 테너였으나 점점 음역이 낮아져 바리톤과 베이스로 바뀌었다.
“베이스인데 소리가 곱다고 하더군요. 소리가 곱지만 그 안에 굉장한 파워가 있다고 합니다. 중학교때 테너로 시작했지만 전 호남신학대 강사였던 장보철 선생님께서 제 목소리의 베이스 기질을 찾아주셨어요.”
남도예고 재학시절부터 그와 인연을 맺고 있는 임해철 호남신학대 교수는 “심인성은 베르디를 하는 베이스 주역으로서 유럽에서 위치를 굳건히 갖추고 있다. 베르디의 주역을 한다는 것은 베이스로서는 어려운 영역이다. 고음과 저음을 아울러야 하고, 파워가 있어야 하는데 그의 목소리의 장점이 이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작년 11월 베로나에서 공연했던 오페라 ‘루치아’를 꼽았다. 그는 라이몬도라는 배역의 아리아를 했는데 그 무대에서 앵콜을 받았다.
“베로나에서 20년간 앵콜이 나오지 않은 공연이었는데 앵콜이 나왔습니다. 꿈의 무대였던 베로나에서 그것도 베이스가 앵콜받은 건 없었던 일이라 멍하니 서 있었죠. 너무 영광이었고 행복했어요. 평생 잊지못할 것 같습니다.”
내년부터 꽉 짜여진 시즌 일정을 소화해내야 하는 그는 오페라의 성지 중 하나인 런던 코벤트 가든 무대에 진출한다. 푸치니의 ‘투란도트’ 중 티무르 역과 ‘오델로’의 로드리고 역을 맡았다. 또 모나코 몬테카를로 오페라단과도 3개의 작품을 공연할 예정이며 일본 도쿄, 스페인 톨레즈 공연도 예정돼 있다.
“큰 욕심은 없습니다. 평생 무대에 설텐데 바램이 있다면 음악적인 정보나 인맥을 공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광주 출신으로서 오페라 무대 정보를 공유하며 제 모든 경험을 풀어내 광주 오페라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광주 오페라 발전을 위해 힘을 더하고 싶다고 밝힌 그는 광주에서 앞으로 더 좋은 성악가가 나오길 기대한다며 말을 맺었다.
이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