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만강 도문 앞 선착장 |
![]() 사이섬(간도) 표지석 |
옛날에 북한이 더 잘 살 때는 중국의 동포들이 북한에 가서 살았지만, 지금은 탈북자들이 너무 많은 실정이다. 탈북자들은 연길은 물론 심양, 북경, 상해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도문에 도착하면 국경지대를 바라본다. 그러나 북한 쪽은 건물 몇 개와 산 뿐이다.
지금은 동포들이 한국에 쉽게 올 수 있지만,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길림, 장춘, 하얼빈 등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들은 돈이 없거나 고향에서 초청해 줄 사람이 없어 한국에 가장 가까운 도문에 와서 북한 쪽이라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 하면서 물끄러미 남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일가친척이 없는 동포들은 꾸준히 불러들여 여생을 고국에서 보내게 해주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산에 요란스런 구호가 많았지만, 요즈음은 조금 줄어든 것 같다. 국경의 다리 중앙에 경계선이 있는데, 어느 때는 가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북한으로 가라고 하더라도 가지 않지만, 그래도 중국군 병사가 경계선까지 따라붙는다. 전에는 대나무 뗏목을 타고 북한 병사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어 돈을 돌멩이에 싸서 던져주면 군인들이 받아갔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돈을 주는 것은 힘들다.
연길에서 도문에 갈 때 두만강의 지류를 따라 가면서 김정구 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한 곡씩 불러 보지만, 오늘날의 두만강은 그 옛날의 두만강이 아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발생지가 도문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 이시우는 동북 지방의 조선인 부락을 순회공연하던 극단 ‘예원좌’의 일원이었다. 때는 단풍잎이 짙게 물들은 늦가을, 바로 요즈음 두만강변 도문의 한 여관에 짐을 풀었다. 싸늘한 냉기가 솔솔 휘감기는 여관방에 누워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구슬프게 통곡하는 여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문풍지 떨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처량했던지 참을 수 없어 소리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몰래 창호지 틈새로 방을 엿보니 한 여인이 소복을 입고 촛불 앞에 간략한 제사 상을 차려놓고 엎드려 솟구치는 오열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이 여관은 3·1운동 이후 독립군들이 지나치는 거처가 되었던 곳, 이 여인은 항일 투쟁으로 집을 떠난 남편의 행방을 찾아 도문으로 왔다. 드디어 남편이 갇힌 형무소를 찾아갔으나 이미 총살되어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밤이 마침 남편의 생일, 그리고 남편은 여관 주인과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빈 방에서 조용히 술이나 한 잔 부어놓고 생일제를 지내려 하였는데, 여관 주인이 알아차리고 제물을 차려주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시우의 가슴에는 나라 잃은 겨레의 슬픔과 한 여인의 처량하고 서글픈 심정이 크나큰 충격으로 밀려왔다. 그 밤중으로 두만강변에 뛰쳐나가 이 노래를 지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매여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추억에 목메는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옛날 연변 지역은 눈물 젖은 두만강, 일송정도 많이 불렀지만, 찔레꽃이 제일 많이 부른 애창곡이었다. 찔레꽃은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 백난아가 부른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김영일이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한 곡으로, 한국의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찔레꽃을 소재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렸다.
처음 백난아가 이 노래를 발표했을 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향수를 자극하는 가사가 시대적 상황과 맞아 떨어지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어 ‘국민가요’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김교성과 백난아가 만주 공연을 다녀온 뒤, 만주 독립군들이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을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가사 중 3절에는 ‘북간도’라는 배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북방의 이국에서 ‘남쪽나라 내 고향’과 ‘못 잊을 동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사연이 소박하게 담겨 있는데다, 푸근하고 따뜻한 창법으로 한국적 정서와 망향의 아픔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KBS 가요무대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를 조사해 발표했을 때, 울고 넘는 박달재에 이어 전체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으며, 북한에서도 계속 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만강이 문학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개항 이후 근대문학에 와서 본격화된다. 그것은 최서해, 김동환, 한설야, 한국 영화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나운규 등 동북 지방 출신의 시인·작가들의 왕성한 작품 활동 속에서 식민지의 시대적 의미와 더불어 나타난다.
일찍이 그들이 태를 살았던 어두운 시대를 노래하며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 문인들의 눈에는 두만강이 오히려 근대의 민족적 수난기에 처연한 무대로 혹은 고국 땅의 마지막 문턱의 의미로 상징화된다.
몹시 퍼붓는 어느 해 겨울이었다.
눈보라에 우는 당나귀를 이끌고 두만강 녘까지 오니.
강물은 얼고 그 위에 흰눈이 석자나 쌓여 있었다
인적(人跡)은 없고 해는 지고
나는 몇 번이고 돌아서려 망설이다가
대담하게 어름장 깔린 강물 위를 건넜다
올 때 보니,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들 손에
넓다란 신작로(新作路)가 만들어 놓였다
지난날 건너던 내외곡 길 위에다(김동환의 ‘선구자’)
1920∼1930년대 일제 식민지의 앞잡이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그 주구(走狗)들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고향과 조국을 등진 유랑의 무리들은 자석에 끌리듯 두만강을 넘어 물 설고 낯선 땅 북간도로 흩어져 끝 모르는 이역의 하늘 저 너머로 무작정 사라져가곤 하였다. 망국의 한을 달래는 곳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도문이다.
/강원구 행정학 박사·한중문화교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