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녀산이라는 높이 821m의 험준한 산 위에 구축한 오녀산성. |
호산산성을 끼고 남으로는 압록강, 서쪽으로는 애하(愛河)가 흐르고 있다. 애하는 압록강의 지류지만 큰 강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보면 애랄하(愛剌河)로 기록되어 있다.
호산산성은 고구려시대 박작성으로 불려졌으며, 명나라 1470년에 재건한 성이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관서팔경의 하나인 의주의 통군정(統軍亭)이 보이며, 가까이에 공군비행장이 보인다. 우리 지역 출신으로 관서별곡을 지은 백광홍 선생과 전상의 장군일 것이다.
성 아래에 2m도 안된 도랑이 있는데, 이것이 국경지대이다. 과자나 빵을 사들고 북한 병사를 오라고 손짓하면 와서 받아갔다. 바로 건너 북한의 생활을 볼 수 있고, 그들에게 말을 걸면 대답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철조망이 쳐 있다. 일보과(一步跨)란 비석은 한 걸음만 건너면 북한 땅으로 압록강에 있는 섬이다.
단동 시내에서 72km 정도 가면 수풍댐이 나온다. 1938년부터 1944년에 만들어진 댐으로 웅장하며, 발전은 북한에서 관리하지만 중국과 공동으로 운영한다. 수풍댐 밑에서 배를 한 시간 정도 타고 내려오면 태평만댐이 나온다.
고구려 첫 수도 졸본성 환인
환인은 고구려의 건국지인 졸본(卒本)이다. 환인에서 가볼만한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가는 길에 옛날 주몽이 건넜다는 비류수는 지금은 혼강으로 불리는데 요녕성에서 가장 큰 댐이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내려와 이곳에 고구려를 건국했다. 오녀산성의 높이는 821m로 아주 가파르다. 버스로 중간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계단이 999개나 된다. 바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18반이란 곳은 경사로 만들어 편하게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오녀산이라는 험준한 산 위에 성을 구축했다. 200m에 달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활용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천지(天池)라 불리는 연못이 있다. 천명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온다는 것이 희한한 일로 고구려가 전쟁할 때 장기적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상에 오르면 궁궐터와 서문(西門) 유적지인 주춧돌이 있다. BC 37년에서 AD 3년까지 40여년 간 수도로 있었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가파른 절벽이기 때문에 남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는 고구려 역사가 같은데, 북한의 역사책을 보면 고구려를 건국한 연대가 BC 277으로 되어 있다.
따로 보관된 박물관에는 발굴되어 있는 물건들이 많이 있다. 군인들이 사용했던 철 가마는 현재의 것과 비슷하였으며, 가마 솥 안에는 화살촉, 도끼, 발 족쇄 등 다양하다.
태극정(太極亭)이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환인현 전체가 보인다. 바로 이곳의 혼강이 태극마크를 그대로 하고 있다. 오녀산성의 절벽과 아름다움보다 태극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 더 감동적이었다.
태극마크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가 많이 있지만, 중국이 대표적으로 사용하는데, 처음 나타난 것은 중국이다. 하남성에 흐르는 황하와 낙양에서 흐르는 낙수(洛水)가 만나게 되면 빙글빙글 돌아 태극마크가 형성된다. 그 지역이 온현(溫縣)으로 태극권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혼강 가에 상고자성과 하고자성이 있는데,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빨리 복원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고구려 두 번째 수도 국내성 집안
환인은 요녕성이지만 두 번째 수도인 집안은 길림성에 속한다. 집안은 고구려의 역사가 가장 많이 숨쉬는 곳으로 우리 조상들의 기상이 서린 곳이다. 집안으로 가는 길은 강원도 산길을 가는 것처럼 굽이굽이 돌아 들어간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시와 맞닿고 있다. 넓은 평지가 아닌 산속에 있는 성으로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요새라고 볼 수 있다.
이곳은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릉, 장군총으로 불려졌던 것을 장수왕릉으로 불리고 있다. 5호분 5회묘에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고, 환도산성에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떼가 모여 있는 등 우리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무덤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 적석묘들이 널려 있는데, 지금 보수중에 있다.
고구려에 대한 역사 서적이 흔한 것을 보면 고구려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을 돌며 북한의 만포시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시내 중심에 고구려 궁궐터가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 안에 돼지 한 마리가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사람들이 돼지를 잡으려 우르르 쫓아다녔다. 그 중엔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도 있었다. 나라에 큰 제사가 있어 제물도 쓰려던 순간에 돼지가 도망을 간 것이다.
돼지를 계속 쫓아가보니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풍경과 분위기가 새로운 도읍지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유리왕이 도읍지로 정했다. 시내에는 아직도 국내성 터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바로 앞에는 북한의 묘향산 식당이 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427년이다. 그로부터 1,60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국내성 터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내 중심부의 아파트 뒤편에 남아있는 성곽의 높이는 2~3m 정도로, 올라가 보면 국내성이란 표지판이 있어 2,000여년 전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아 성벽을 어루만져 본다.
집안을 찾아오는 한국인들은 관광객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이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방문하여 관광객은 거의 없고, 요즈음 한국인들보다 중국인들이 찾고 있다.
졸본성에서 천도한 고구려의 2대 유리왕이 축조한 국내성의 위용은 이제 자랑할 만하다. 유리왕은 송양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나 이듬해 사망하고 만다. 다시 두 여자를 얻어 화희와 한인의 딸 치희를 얻었다. 그런데 유리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간 사이 두 여자가 크게 싸워 치희가 도망 가버렸다.
치희를 잊지 못한 유리왕이 어느 날 나무 밑에서 쉬다가 황조 암수가 서로 정답게 노는 것을 보고 부른 노래가 우리 국문학사에 전하는 황조가다. '펄펄 나는 꾀꼬리, 암숫놈 서로 지저귀는데. 나의 외로움을 생각하니, 그 누구와 돌아갈 것인가!' 고구려 역사를 알기 위해 반드시 가 보아야 할 곳이다.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