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 추모공연. |
![]()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 소극장 연습. |
“내 시의 요람은 안락의자가 아니고 투쟁이라고 그 속이라고/ 안락의자야말로 내 시의 무덤이라고”(시의 요람 시의 무덤)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
시인 김남주(1945~1994). 그는 해방둥이로 해남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남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친구 이강 등과 함께 전국 최초의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배포하다 구속됐다. 그리고 이때의 구속 경험을 시 ‘잿더미’와 ‘진혼가’로 써서 197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다.
하지만 김남주는 시인보다는 유신독재에 온몸으로 맞서 싸우는 ‘전사’이고자 했다. 그리고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라는 저항정신으로 1978년 상경해 남민전에 가입해 1년여 동안 활동하다 구속 수감돼 9년 3개월간 옥중생활을 했다. 종이와 필기구조차 제공되지 않는 혹독한 옥중생활이었다.
흥미 있는 사실은 0.75평의 부자유한 공간에서 겪은 9년 3개월의 옥중생활은 김남주를 누구보다 시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우유곽 안에서 벗겨낸 은박지를 원고지 삼아 한 글자 한 글자 못으로 긁어 시를 썼다. 데뷔 당시 창작과비평 편집자였던 원로평론가 염무웅은 “9년 3개월의 옥중생활 동안 그는 360여 편의 시를 썼는데, 아마 이것은 세계문학사에서도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렇듯 김남주가 쓴 1980년대 ‘옥중시’는 군홧발로 5·18을 진압하고 등장한 불의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문학적 정의의 뜨거운 상징이었다.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라는 같은 표현은 아주 작은 예에 불과하다.
그 무렵 문청이었던 나 또한 시인이 쓴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같은 옥중시의 ‘세례’를 듬뿍 받았다. 특히 자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학살1,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같은 시들은 당시 집회 현장에서 단골로 낭송됐고, 그의 시는 민중가요로 재탄생해 널리 불렸다. 또 김남주가 옥중에서 번역한 하이네, 브레히트, 네루다 같은 세계 혁명 시인의 시 또한 문학과 운동을 고민하는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상상력의 국제연대가 이루어진 셈이랄까.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1990년대 초반 소련 및 사회주의권은 일제히 몰락했고, 갈수록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시장 파시즘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시인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를 비롯한 국내외 문인 등의 석방 노력으로 1989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마침내 출옥했다. 그리고 1989년 1월, 광주 문빈정사에서 오랜 동지인 약혼자 박광숙과 결혼하며 생활인으로서 부푼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시인에게 허락된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시인은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병마로 1994년 2월 13일에 49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뤘지만 일상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미완의 숙제로 남았다. 5공화국 시절 같은 노골적인 군홧발 독재는 사라졌지만, 저강도 독재는 여전하다.
그래서, 수상한 시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시절에 ‘김남주’라는 시인을 소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특히 김남주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많은 시절에 김남주라는 시인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세계를 잃고 그대 하나를 내 얻었나니
지난달 28일 오후 6시 30분 해남군 해남문화예술회관 공연장에는 경향 각지에서 모인 300여 명의 관객들이 모였다. 해남군민을 비롯해 학술심포지엄 참석을 위해 모인 문인들 그리고 일반 관객들이 좌석을 가득 메웠다. 해남 지역 단체는 물론 광주·전남 지역 예술인들 그리고 한국작가회의·길동무·광주전남작가회의 등 전국의 문인 단체들과 연계해 국제학술행사, 청년문학제, 전국 문학인의 밤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한 사업회 관계자들이 고생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시인 김남주 추모 30주년 행사를 총괄하는 김남주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가 준비한 큰 행사는 시극과 국제학술심포지엄이었다. 민족시인 김남주의 시와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 대중적으로 확산하고자 한 행사였다. 특히 사업회가 주최·주관한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연출 박정운)은 눈길을 모았다.
시극은 시인 김남주와 평생 동지였던 박광숙과의 ‘사랑’을 스토리 라인으로 하되, 옥중시집 나의 칼 나의 피(1988)에 수록된 시들이 당시 일반 민중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져가는 과정을 다뤘다. 연출자의 의도에서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고 염원한 김남주의 불굴의 저항정신이 다시 한번 들불처럼 번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김남주-박광숙, 두 사람이 철창을 사이에 두고 나눈 동지적 사랑은 너무나 처연해서 너무나 유명하다. 정식결혼조차 안한 박광숙은 호적에 ‘아내’라고 올리며 서울에서 광주시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까지 십년 가까이 지극 정성으로 옥바라지했다. 옥중서한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1989)에는 두 사람의 가슴 저미는 사연들이 가득하다.
시인 또한 어느 시에서 “세계를 잃고 그대 하나를 내 얻었나니/ 그대 이름 하나로 우주와 바꿨나니”(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라고 썼다. ‘온기’라곤 하나 없는 차디찬 감옥 철창을 두고 주고받은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컸으면 그런 표현을 썼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은박지에 새긴 사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단인 ‘토박이’와 사업회가 손을 잡고 제작했다. 극단 토박이는 지난해 창단 40년을 맞았고, 2024년에는 환생굿으로 한국민족극협회가 주는 제2회 박효선연극상을 수상했다.
대본과 연출은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에 수록된 김남주 시 30여 편을 바탕으로 박정운이 짰고, 작곡은 가수 한보리와 박성언 등이 맡았다. 김경윤 회장은 “10주년 때는 깃발춤과 풍물패가 등장했지만, 이번 시극에는 젊은 배우들이 현대적 춤과 안무로 인간 김남주의 고뇌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연출자의 의도를 반영하듯이, 무대는 1층에 상가와 집들이 있고, 가운데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 교도소가 있는 2층으로 꾸며졌다. 9장으로 구성된 시극은 요즘 공연계의 트렌드가 된 ‘음악극’으로서 매우 훌륭했다. ‘수인번호 2164’ 김남주 역을 맡은 배우(신현종 분)의 연기는 감정 표현이 폭넓었고, 박광숙 역을 맡은 배우(최혜민 분)는 노래 솜씨가 특히 출중했다.
가수 한보리의 노래는 극 전개에 따라 템포와 분위기를 조절하며 마치 밀물과 썰물이 이는 파도처럼 관객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했다. 박성언이 작곡한 노래 자유에서는 가수 안치환 버전과는 다른 맛과 분위기가 느껴져 신선했다. 연출자 박정운은 “총체 시극을 준비하면서 시 하나하나가 전사적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듯했다”고 말했다.
여하튼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은 시인의 ‘사랑’과 ‘자유’를 향한 외침과 열망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음악극이었다. 시인을 전혀 모르는 젊은 관객들이 어떻게 보았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특히 시인의 죽음을 예감하며 10명의 배우가 마지막 인사를 합창할 때에는 객석에서 눈시울을 훔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잘 있게 친구/ 그대 손에 그대 가슴에/ 나의 칼 나의 피를 남겨두고 가네.” 그렇게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은 90분 남짓 동안 진행됐다.
●‘나’ 자신에 대해 저항한다는 것
왜, 지금, 김남주인가.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을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다른 관객들 또한 객석에서 비슷하게 생각했으리라. 그리고 지금, 여기에 필요한 것은 공허한 미래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가 넘치는 좋은 세상을 위해 또 다른 ‘저항’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했던가.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어떤 ‘비전’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시인 김남주가 저항한 대상은 불의한 독재정권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특히 김남주 시인은 자신의 상투성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고자 했다. 시와 삶에서 철저히 그렇게 했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 저항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자신의 상투성에 저항하지 않는 태도는 결국 ‘타락한 저항’이 된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더 살려 지금 여기 젊은 관객들과 소통하며 대화했으면 한다. 극단 토박이를 대표하는 레퍼토리로서 광주·전남 지역은 물론 서울 등지에서도 상연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다시 한번 묻는다. 왜,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인가. 시극 공연에 앞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 문학과 자유에서 원로평론가 염무웅이 한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동학농민전쟁 한 해 전에 열린 저 1893년 봄 보은집회에 빗대어 오늘의 추모 자리는 ‘해남집회’의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김남주 시인이 민중해방과 민주주의 그리고 조국의 자주통일을 바랐던 것처럼, 오늘의 위기를 넘어설 새로운 ‘혁명’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좋은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바야흐로 그 ‘때’가 오고 있는가. 시극을 보고, 학술대회 발표를 들으며, 시인이 입버릇처럼 한 말을 되새김질한다.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울 것이다.
![]() 고영직 평론가 |
△1992년 평론 활동 시작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비상임 이사 역임 △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저서 인문적 인간, 삶의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