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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녘

울부짖듯이 웅웅거리는 거친 비바람 소리. 해마다 이맘때의 바람은 하룻밤 사이 온 들녘을 발가벗겨 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웬일인지 모두가 찬사를 던지며 방방곡곡 단풍 구경을 떠날 때는 잠잠하다가도 겨울을 몰고 오는 대지의 가쁜 숨소리에는 잠자코 한 자리에 머물 수가 없다.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를 휘…

2022.01.19 17:32

그믐달

밤새 누가 그리움이라는 그믐달을 손가락 끝에 앉혀 놓았을까. 인연이 다해 몸밖으로 떠밀린 손톱. 몸에 새겨진 이별의 흔적은 쓰리고 저려, 시간이 흘러도 손톱처럼 자라 그날의 상흔을 다시 끄집어낸다. 첫사랑, 그녀와의 인연은 보름달처럼 환했다. 아득한 나의 먼먼 인생 항로까지 환하게 밝혀 줄 것 같았다. 그녀와의…

지붕 위로 달이 기울고 있다.   |    2022.01.12 17:24

빨간모자

우리 동네 과일 파는 아저씨는 항상 빨간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동네가 막 생겼을 때부터였으니까 올해로 근 20년이다. 그는 변함없이 길거리 노점에서 과일을 판다. 계절에 따라 종류는 달라져도 머리 위의 모자는 언제나 한가지다. 내가 아는 한 그는 한 번도 다른 색깔의 모자를 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벗은 적도 없다.…

2022.01.05 18:08

예언

해마다 새해가 되면 한 해를 예언하는 역술인들의 기사가 실리곤 한다. 과학문명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수천 년 전의 주역이나 점성술 등의 예언을 믿고 살아서는 안 된다. 점쟁이들은 전문가처럼 정확한 정보 분석에 따른 예측 없이 주술적으로 미래를 예언하기 때문에 맞힐 수가 없다. 다만 토정비결처럼 어느 사건에…

#2021122901001004500031701#   |    2021.12.29 15:28

귀갓길

저무는 해와 동무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종종걸음이다. 오늘처럼 진눈깨비라도 휘날리는 날은 으슬으슬 마음까지 스산하다. 도시의 서쪽 끝, 산과 강물로 둘러싸인 동네. 은근히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했는데 이런 날엔 슬며시 부담으로 다가온다. 러시아워의 혼잡한 대열에서 벗어나 비교적 한적하고 신호등이 적은…

2021.12.23 17:40

바닥의 힘

산길을 걷는데 길 한가운데 피어난 질경이꽃이 유난히 예쁘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라 온전한 초록 잎사귀가 거의 없다. 잎사귀 같은 온몸이 발길에 채여 멍들고 아팠을 텐데도, 꽃은 아픈 내색 없이 활짝 피어 있다. 독 오른 뱀처럼 대가리 꼿꼿이 치켜든 신발이 다가오면 질경이의 심장은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두려…

2021.12.15 17:44

그의 담배 혹은 연기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경전을 읽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곱게 물든 단풍도 축축 비에 젖고 있었다. 그 사이로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갑자기 담배 한 모금이 간절해진 그는 바짝 향로 곁으로 다가갔다. “이 방은 우리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니 일절 연기가 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언제 보았는…

2021.12.08 16:33

은하수

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좋아한다. 밤하늘에 신비롭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면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수많은 별들 중에서 어느 이름 없는 행성에 외계인과 같은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 지구인은 우주선을 타고 가서 UFO(미확인비행물체)를 타고 온 외계인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이 이…

2021.12.01 17:46

뒷모습

산천이 온통 스산하다. 초겨울의 매찬 바람결을 이겨내지 못한 생명체들은 하나같이 동면을 서두르고 있다. 두어 해를 비워두어 바람이 숭숭한 시골 오두막. 여미고 다독이며 간신히 입주했다. 생장의 기미를 멈춘 뜰 안의 풍경은 보이는 곳마다 을씨년스럽고 썰렁하다. 도회지에서 끌고 온 것도 아니건만 회색빛 시멘트 담…

2021.11.24 17:13

국화꽃

책장 위에 올려놓고 잊고 있었던 화병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물을 갈아 주고 한 묶음의 가을 절정을 다시 화병에 꽂는다. 지상과 허공 사이의 간극에 물오른 가을 신화를 펼쳐 놓는 국화꽃들로 10월은 뜨거워지고 있다. 저 향기로운 빛깔은 언제부터 삶에 대해 확신이 서 있었을까. 부러워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말…

2021.11.17 18:06

여행자의 노래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네. 아장거리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고 그만큼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쌓인 곳이지. 거기 머문 동안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네. 어울려 지내던 이웃들이 쏙쏙 빠져나가곤 해도 나는 마땅히 이유가 없었다네. 지내기에 불편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새집을 원하지도 않았어. 식구들 돌보…

2021.11.10 16:59

어떻게 사는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알고 지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무소식이 희소식만은 아니었다. 정년퇴직을 한 후에는 전화도 뜸하여 함께 지냈던 사람들의 소식도 잘 모른다. 더구나 내가 자주 전화를 하지 않으니 전화하는 사람도 적어졌다. 어쩌다 걸려오는 전화도 “요즘 어떻게 사는가?”…

2021.11.03 18:10

본향

아침부터 밤까지, 아니 날마다 그냥 쓸쓸하고 슬펐다. 고향 집을 떠난 객지 생활. 좀 더 나은 교육환경 때문이라고 했으나 겨우 9살 아이가 받아들이기엔 가혹한 생활이었을까. 등하교 때는 물론,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시간마저도 부모 형제와 집이 마냥 그립기만 했다.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

2021.10.27 14:36

옹이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왼쪽 엄지발가락이 살살 아파온다. 퇴근 후에 양말을 벗다 말고 왼발을 살핀다.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 쪽으로 휘어져 있고, 엄지발가락의 관절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뭉툭한 모양새가 나무의 몸에 박힌 옹이 같다. 서러운 제 속내를 소리 없이 꺼내놓기라도 하는 듯 돌출된 관절이 빨갛게 부어 있…

#2021102001000356300010711#   |    2021.10.20 18:50

언덕배기 그 나무

앵두나무가 있었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다가 꽃 피고 열매 맺을 때면 저절로 눈길이 갔다. 꽃은 화사하고 열매는 붉었다. 알알이 붉은 열매를 보면 어김없이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막상 입안에 넣어보면 과육도 많지 않고 씨앗도 커서 실상 먹을 것은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따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아찔한…

2021.10.13 00:34

붉은 소나무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갔더니 천연기념물처럼 잘생긴 소나무가 먼저 이사를 와 있었다. 그 소나무는 가지가 많이 퍼진 ‘300년 된 반송으로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 무명지에서 옮겨온 다박솔’이라고 안내 표지까지 있었다. 그런데 주민들은 이 소나무를 ‘오억이’라고 불렀다. 5억 원을 들여 소나무를 아파트에 옮겨 심었다고…

2021.10.06 00:13

마당

아침잠을 털어내자마자 서둘러 마당을 쓴다. 이 집으로 이사를 한 후, 비가 오는 날이 아니고는 매일 반복되는 일이다. 밤새 내린 이슬의 감촉이 손끝에 촉촉이 감겨온다. 대빗자루 끝이 흙을 파고들어 그림 아닌 그림이 그려질 만큼 온 힘을 다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당을 쓴다기보다는 미세하게나마 흙을 뒤엎는다고나 …

2021.09.29 00:23

걸음의 방식

지나왔던 길을 되짚어보면 수많은 걸음들이 보인다. 홀로서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청춘의 걸음이 보이고, 어지러운 슬픔 안고도 자식을 키우기 위해 바들거렸던 중년의 걸음도 보인다. 그 걸음들이 모여 사랑이라는 집을 짓고 삶의 탑을 쌓으며 여기까지 왔다. 생각해 보면, 생의 전환점마다 걸음의 방식은 달랐다. 현실로…

2021.09.22 11:24

헤드라이트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 있고 사방은 고요했다. 왁자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홀로 빠져 나오기란 생각보다 쓸쓸한 일이다.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처지라니. 나는 거의 참석을 못 하거나 한다고 해도 중간쯤에나 갔다가 끝나기도 전에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반이라도 걸쳐놓고 집으로 오는 길엔 왠지 뿌듯…

2021.09.15 09:14

펭귄의 죽음

코로나가 만연한 올 여름은 매미소리가 지겨울 만큼 폭염이 극심했다. 지구 온난화로 이상 기온인데다 세계 곳곳에 산불이 발생하여 마치 지구가 불타고 있는 듯하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에서는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과 빙하가 지구 기온의 상승으로 녹아내리자 방수포로 덮고 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2021.09.08 00:32

비와 세월

여름의 뒷자락을 부여잡고 돌발적으로 찾아온 장맛비. 후텁지근한 대지를 그나마 시원하게 식혀줍니다. 징징하고 지루한 것이 장마라고들 하는데 반기지 않는 손님인 줄은 아는 모양입니다. 연일 보도되는 비의 난폭한 모습은 이제는 더할 수 없는 공포입니다. 기억 속의 비는 늘 설렘이고 기다림이었습니다. 지친 일상을 …

2021.09.01 00:23

울게 하소서

첫 손주가 태어났다. 새벽길을 재촉해 달린다. 서울까지 가려면 서너 시간이나 걸리는데 버스는 굼벵이다. 시간이 왜 그리도 더디 가는가. 마음속으로 버스를 채찍질하여 도착한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면회 시간에나 볼 수 있단다. 그 앞에서 바장이는데 때가 되자 신생아실 커튼이 걷힌다. 유리창 너머 아이는 눈을 감…

2021.08.25 08:45

어쩌다

어쩌다 나는 개와 노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을까?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는 네발 짐승에게 발목 잡혀 어쩌다 그의 반려 노릇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뿐인가. 요즘엔 고양이도 좋고 심지어는 까마귀조차 사랑스럽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공연히 즐겁다. 마음도 순해지고 맑아지는 듯싶다. 사람들을 만날 때 보다 그들과 …

2021.08.18 09:29

존재의 흔적

지난해 슬픈 별리가 있었다. 가까운 친척, 은사님, 직장 동료, 친구의 연이은 죽음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다정다감하게 지냈던 사람들과의 헤어짐은 작은 파도가 모여 큰 파도가 되듯이 슬픔은 상실감으로 이어져 며칠 동안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더구나 고인이 생전에 베풀었던 은덕과 지난 세월 아름다웠던…

2021.08.10 21:33

다리(橋) 유감(有感)

먹장구름이 몰고 온 세찬 빗줄기가 들끓는 대지를 시원하게 식혀준다. 정지되어버린 듯 나른하고 느릿하게 움직이던 전원의 여름 풍경도 본능적인 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오수(午睡)를 즐기던 뜰 안의 식구들 역시 수런수런 몸놀림이 빨라진다. 거미들은 처마 밑 천장에 바짝 붙어 집을 짓고 모기들은 비교적 흔들림이 작은…

2021.08.04 10:05

흔들리며 가는 길

승용차 대신 완행버스를 타기로 했다. 외진 바닷가로 가는 길이다. 손수 운전으로 인한 피곤도 덜고 차창으로 스치는 남해의 정취를 느긋하게 만끽하기 위해서다. 도심과 근교를 벗어나자 버스는 굽이진 길을 감돌며 잦은 정차와 출발을 해댄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처음 기대와는 달리 버스 안은 시금털털한 냄새를 풍긴다…

2021.07.28 00:52

모기 물린 밤의 상상

또 잠을 깼다. 까무룩 꿈속에 들었나 싶은데 그 틈에 또 한 방을 물리고 말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거푸 나를 노리는 게 괘씸하기 짝이 없다. 얇디얇은 이불마저 발밑으로 내쳐져서 내 몸은 거의 맨사댕이 상태지만, 설마 모기에게 헌사하고 싶었겠나? 일어나 불을 켜니 앵앵대던 소리는 간 데도 없고 부풀어 …

2021.07.21 10:04

환생

지난해 여름, 섬진강에서 큰 홍수가 났다. 집이 물에 잠기고 사람과 가축이 떠내려가면서 많은 피해를 주었다. 소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고, 수십 마리의 소떼가 531m나 되는 사성암까지 올라갔다. 구례 사성암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조사가 세운 암자로 신라시대 원효 대사, 의상 대사, 고려시대 도선 국사, 진각 국사가 …

2021.07.14 07:51

‘바람별 마을’ 촌장

“어릴 때 꿈이 무엇이었어요?” 지인으로부터 받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말더듬이가 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니 자라면서 무엇이 되어보겠다던가 또는 어떤 모습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산골 마을 딸부잣집 맏이로서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허기진 마음의 공…

2021.07.07 00:15

푸른 기적

귓바퀴 안으로 윙~ 하는 소리 흐른다. 눈언저리에 빛이 고인다. 머리끝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한 의식의 핏줄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죽음 같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손가락을 까딱대 본다. 육신의 실체가 느껴진다. 들숨을 몰아들이니 등판이 움직인다. 눈살에 희붐한 빛이 스며든다. 방안 주변을 헤아려 본다…

2021.06.2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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