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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병상련

경칩 춘분이 지나자 움츠렸던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동물원, 원숭이 코끼리 사자의 우리 앞엔 구경꾼들의 발길이 오간다. 한데 말(馬)을 구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애잔해선지 호젓함에 끌린 건지 마사(馬舍) 앞으로 다가선다. 말은 무리에서 벗어나면 외로움을 탄다는데, 매화 송이 터지는 봄철인지라 더욱 그렇겠…

2021.04.07 00:39

아버지 생각, 술 생각

제사를 마친 아버지는 나에게도 술잔을 건네셨다. 나는 아직 예닐곱 살 꼬마에 불과했지만, 선뜻 잔을 받았다. 마시면 복을 받는다는 말에 저절로 이끌렸던 것일까. 아니면 의관을 정제하신 아버지 모습이나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함부로 거역할 수 없게 했던 것일까. 작고 붉은 목기에 담긴 그것은 겨우 혀끝을 적실 정도…

2021.03.31 01:01

두 개의 시계

인생은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 손목시계를 차고 다닌다. 그동안 여러 개의 손목시계가 있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가진 시계를 비롯하여 스위스에서 구입한 시계, 박사학위 기념으로 받은 금시계, 정년퇴직할 때 훈장과 함께 받은 대통령 휘장이 새겨진 시계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두 개…

2021.03.24 09:28

보따리 싸기

새벽부터 일어나 부엌에서 동동거리고 있다. 휴일이면 시골로 향하는 남편 손에 들려 보낼 반찬을 싸기 위해서이다. 음식 보따리를 꾸리는 일이야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요즘 부쩍 신명을 내는 것은 예전의 버릇이 도졌다고나 할까. 보따리에 대한 내 이력을 들춰보자면 제법 긴 세월을 거슬러야 한다. 동생들을 데리고 중…

2021.03.17 09:30

왜가리로부터의 상념

이슥한 밤, 생명이 에너지를 충전하여 영혼의 키를 한 뼘씩 키우는 시각이다. 어둠은 밝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밤에 다시 펼쳐 놓고, 그 사유의 뜨락으로 손목을 잡아 이끈다. 그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던 왜가리 한 마리, 먹이를 잡기 위한 모습이 아니었다. 두 발목을 강물에 서려두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

2021.03.10 10:20

마당에 대하여

오매, 요런 째깐한 데서 뭘 할라니까 옹색시러 죽겄네잉…. 설거지를 하다말고 나도 모르게 푸념을 쏟는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오늘처럼 김치라도 담근 날엔 주방 개수대가 유난히 좁게 느껴져서다. 물은 튀고, 큼지막한 양푼들은 주체하기도 어렵다. 마당이 있으면 할랑할랑 편하게 했을 일이다. 문득 숨어 있던 풍경 몇…

2021.03.03 00:12

아름다운 마무리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데,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이승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지난해 인생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있어 안타까웠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쩔 수 없더라도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 곱게 물든 저녁노을처럼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줄 알아야 한다. 몇 년 전…

2021.02.24 07:16

까치 까치 설날은

아침부터 뜰 안이 부산하다. “깍깍 깍깍!” 울음소리에도 어느 때보다 힘이 실려있다. 꽁꽁 얼어붙었던 산천이 풀려가고 있으니 저들인들 이 봄빛을 한 올이라도 놓치고 싶겠는가. 10여 년 전 이맘때쯤, 옆 마당 언덕 위에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갈참나무, 뽕나무, 느릅나무의 기상을 올려다보는 재미는 종일 이어…

2021.02.17 01:05

눈물을 듣는다

툭 툭 툭, 무슨 소리인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호흡을 다독이며 잠을 청해 보지만 머릿속이 말짱해지기만 한다. 의식의 모서리를 스치며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저 소리. 눈을 감으면 선율 같기도 하다가, 눈을 뜨면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도 같다. 자정을 넘긴 지도 한참인 이 시각,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

2021.02.03 00:32

나의 유토피아

뒷산 중턱에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가끔 산에 오르곤 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면 좋으련만 그저 부산하게 오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날은 해질녘에야 산에 갔다. 종일 혹사당한 머리를 좀 쉬고 싶었다. 숲은 조용했고 마침 운동기구들도 비어 있었다. 나는 비스듬히 놓인 긴 의자에 가서…

2021.01.27 09:29

인생이 가는 길

인생(생명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낯선 길을 간다. 그 길은 처음 가는 길로 한 번밖에 갈 수 없으며,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다. 그 길을 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좋은 길동무를 만나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바른 길을 가기 위해 훌륭한 선인들…

2021.01.20 09:50

미완(未完), 그 영원성

문밖 출입을 멈춘 지 보름도 훌쩍 넘은 듯합니다. 코로나 역병은 공포를 넘어 온 세상을 점점 고립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두 학기 동안이나 선생이 학생을 만나지 못하는 생활은 하루하루를 종잡을 수 없는 허둥거림으로 보내게 했습니다. 다만 지금의 상황이 유한할 것이라는 믿음만이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

2021.01.12 19:00

겨울 산사山寺에서

불이문不二門 돌층계에 매운 햇살 한 줌 머물러 있고, 삼층석탑 위로는 칼칼한 삭풍 한 자락 스쳐 지나갑니다. 산바람이 우려낸 풍경소리가 속진俗塵으로 얼룩진 속뜰을 대웅전 앞 뜨락으로 이끌어 놓습니다. 시방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게 무엇일까를 짚어봅니다. 힘겨운 소용돌이를 몰고 온 코로나 역병으로 몸살을 앓고…

2021.01.06 10:20

마음으로 그리다

단정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어느 선비의 초상화. 나는 지금 그 앞에 서 있다. 제목은 ‘심득경 초상’. 공재 윤두서가 1710년에 그린 것이다. 가지런한 수염과 화사한 얼굴빛, 붉은 입술, 고요한 눈동자. 머리에 쓴 관은 기품이 느껴진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옷과 흐트러짐 없는 매무새가 반듯하고 깔끔하다. 보이…

2020.12.30 14:22

코로나 시대에 살면서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COVID19’가 발병한 지 1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소멸되기는커녕 더욱 기승을 부려 전 세계 코로나 확진자가 6,500만 명이며, 사망자가 150만 명이나 된다. 나도 코로나가 무서워 몇 달 동안이나 머리도 안 깎고, 모임에도 안 나간 채 집콕만 하고 있는 거안 도사(居安 道士)…

2020.12.23 01:08

시인들의 노래

어릴 적 내 고향엔 맑고 순후한 시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과 사람들을 사랑했고, 솟구치는 정열을 온몸으로 노래했습니다. 켜켜이 쌓이고 쌓인 한(恨)이 사무쳐 광인(狂人)의 몸이 되었지만 그들의 가슴은 늘 따뜻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심심풀이 삼아 놀리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살았고 이웃으로 인정했습니…

2020.12.09 09:22

바람 부는 들판

역설의 계절이다. 가을걷이 끝난 뒤 황량한 들판은 수척하고 허기를 느낄 수밖에 없는 곳. 기억 속의 빈 들판은 갈기 푼 바람이었다. 그곳은 한 번도 정지해 본 적이 없는 바람 소리뿐, 바람에는 혼란과 떠돌이의 냄새가 났다. 바람은 가슴을 헤집어 살과 뼈를 지나는 동안 부끄러움을 일으키고 피를 마르게 했다. 하나 세월…

2020.12.02 09:26

계획이란 무엇인가

방학 때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계획을 짜는 일이었다. 숙제 중의 하나긴 했지만 발군의 실력자가 되리라는 포부도 은근히 작용했다.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일등도 문제없으리라. 희고 두툼한 종이 한 장을 준비했다. 컴퍼스에 연필을 끼운 다음, 종이 한가운데 침을 고정하고 크게 원을 그렸다. 시간별로 칸을 나누고…

2020.11.18 09:24

우분트

몇 년 전에 행복지수 세계 1위인 덴마크를 갔을 때였다. 자전거를 타고 온 한 무리의 학생들이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들 중에 유난히 얼굴이 검은 녀석이 내게 다가와 서툰 영어로 어…

2020.11.11 09:24

빛과 어두움

산천이 온통 적막 속에 잠겨 드는 일몰의 시간. 혈육과 보낸 고향에서의 하루를 접고 다시 일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클랙슨 소리마저 유순해진 차들은 하나, 둘 어둠의 침묵 속으로 사라져간다. 날짐승, 들짐승들 역시 서둘러 둥지에 깃들였는지 간간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숨소리만이 적막을 깨운다. 하…

2020.11.04 09:48

등을 밀고 가는 것은

버스가 잠시 멈췄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요깃거리를 사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빵 가게 앞엔 머리칼이 성성한 여인이 콜라병을 쥔 채 앞서 있었습니다. 여인이 건네받은 것은 종이봉투에 담긴 호밀 식빵이었습니다. 저도 먹을거리와 생수를 사 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인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

2020.10.28 09:00

벌레 울음을 듣는 밤 -이옥(李鈺)의 ‘충성부’를 읽다-

밤낮으로 풀벌레 소리가 쟁쟁하다. 한밤중엔 더욱 커져서 온 세상이 벌레 소리로 가득 찬다. 모든 소리를 덮어버릴 듯 성성한 울림에 자리에 누워서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소리는 맑고 깨끗해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 같기도 하고, 깊은 동굴 속 또르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같기도 하다. 청산의 별곡인 듯 청아한 음색…

2020.10.21 09:12

하늘 메아리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그때 사랑하는 사람을 소리쳐 부르면 하늘 끝 어디에선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밤하늘을 보면, 아스라이 먼 별에서 이승을 떠난 영혼들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워…

2020.10.07 00:35

빛이 사는 동네

어린 날, 뜬금없이 빛의 근원지가 남쪽일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다. 고향마을 동쪽은 큰 산이 있어서 바깥세상을 생각하기엔 까마득했고, 서쪽은 숲과 초원이 펼쳐져 해거름이면 소들에게 풀을 뜯기며 노을을 보던 곳이었다. 공동묘지가 있는 북쪽은 초상이 날 때마다 슬픈 상엿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날씨가 궂은 …

2020.09.23 09:18

시간의 추錘

뒤엉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앞뒤가 뒤섞여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헷갈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실꾸리가 엉클어진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과거는 흘러가 박제돼 있고, 미래는 주저하면서 중얼중얼 다가오며, 현재는 매 순간마다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 일전 길거리에서 만난 지인과의 대화가 생뚱맞기만…

2020.09.09 10:27

프레드릭

마실 가듯 성산(담양군 지실 부근)으로 간다. 그곳은 나의 별장이다. 자그마치 열 채도 넘는다. 식영정, 서하당, 소쇄원, 환벽당, 명옥헌, 송강정, 면앙정, 풍암정…. 이 범상치 않은 단어들이 내 별장의 이름들이다. 내키는 대로 나는 이집 저집을 순회한다. 세상에 땅 한 뙈기 갖지 못한 내가 이렇게나 호사를 누리다니 암…

2020.09.02 11:12

초록 볼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더구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물건을 평생토록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군대에 갈 때, ROTC 축제 때 만난 첫사랑의 여인이 자기에게 편지를 쓸 때 사용하라고 선물로 준 초록 볼펜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 볼펜은 초록빛 ROTC 반지와 함께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 중의 하나이…

2020.08.26 11:54

보호자

오늘도 어김없이 어머니가 드실 죽 보따리를 움켜쥐고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다. ‘보호자증’이라는 명패와 함께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았다는 응답서가 담긴 ‘QR(Quick Response)코드’를 휴대폰 화면에 띄워 제시한 후 발열체크에 합격해야 만이 병원 입구를 통과할 수 있다. 88세의 연세로 ‘뇌출혈’이라는 병명을…

2020.08.19 09:20

귀를 기울여보라

‘치, 아빠만 생각해!’ 이 무슨 앵돌아진 소리인가.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습니다. 금남로 지하상가. 발걸음소리와 말소리, 어디선가 흘러나온 노랫소리와 알 수 없는 소리로 북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말의 출처는 뒤쪽 빵집 앞에 있었습니다. 소녀가 말소리의 주인공이…

2020.08.12 10:29

바닥의 시간

바닷가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새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루다가 동트는 것을 보고서 밖으로 나왔다. 고양이 몇 마리가 풀숲으로 숨어들고, 분꽃이며 나리꽃 핀 꽃밭에선 박각시나방이 긴 부리를 꽂아 꿀을 빨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나도 풍경인 듯 가만히 서있다가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 팡팡 불꽃놀이 즐기…

2020.08.05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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