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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아궁이에 불을 땐다. 연기로 제 몸을 동여맨 불길이 막막한 내일 같은 아랫목을 뜨끈하게 뎁혀주고 있다. 먹성이 좋은 아궁이는 불 맛이 입에 맞는지 타닥타닥 깨물고 있다. 차갑거나 뜨거운 아랫목의 자세를 결정하는 건 다들 장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불꽃을 피워 올리겠다는 아궁이의 생각이 집중돼야 아랫목…

#2024040301000139300003271#   |    2024.04.03 17:58

오래된 책의 향기

오래된 책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책을 사니 안 사니, 보니 안 보니 해도 하루에도 수많은 책이 출판된다. 하지만 나오는 새 책만큼 버려지는 책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면 나는 버릇처럼 버려지는 것들을 살펴보곤 한다. 책이 있나 없나를 보는 것이다. 주로 아이들 책이 대부분이…

#2024032701000827500025761#   |    2024.03.27 17:38

부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부자는 돈에 궁핍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어 가난한 사람보다 유리한 점이 많다. 그렇다고 아무나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부자라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국민소득과 행복지수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3 한국 부…

#2024032001000612900019221#   |    2024.03.20 17:25

내일을 안고 피는 꽃

전원으로 이사를 한 후 10여 년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기다림과 설렘의 시간이었다. 이사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황량한 텃밭이며 마당이며 장독대며 일감이 산재해있는 집으로 뛰어드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출퇴근에 문제가 없는 도심 속의 전원이었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어등산 줄기와 유유히 흘러가는 황룡…

#2024031301000383000012141#   |    2024.03.13 18:39

낡은 자전거

자전거가 길가 바닥에 넘어져 있다. 거칠고 납작한 오후의 숨이 할 말이 많다는 듯 안장에 붙어 있다. 그동안 달빛과 파도 소리 흘리며 달려왔던 길의 경사가 심해 길 멀미를 한 것일까. 토사물 같은 녹슨 자국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생의 둥근 표정 같은 두 바퀴는 위태로웠던 오르막과 내리막을 벗어놓고 숨을 고르고 …

#2024030501000115900004001#   |    2024.03.06 23:45

봄소식

봄이란다. 봄은 겨울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생명이 태동한다는 희망으로 부푼 계절이다. 한데 봄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요즘은 비교적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인데도 지구온난화로 언제부턴가 봄과 가을이 실종되어 버렸다고들 말한다. 달력상으로 절기를 나누자면 3월부터 5월이 봄이다. 하지만 절기상으론 입…

#2024022801000848300024931#   |    2024.02.28 18:02

돌탑의 허상

어떤 등산객이 산행을 하다가 갑자기 똥이 마려워 길가에 똥을 쌌다.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보기에 안 좋아 주위에 돌을 몇 개 모아 덮어 놓았다. 그 후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 돌 위에다 돌을 얹어 돌무더기가 됐다. 어느 날 누군가가 돌무더기 둘레에 큰 돌로 받침돌을 세우고 돌탑의 형태를 만들어 놓았다. 세…

#2024022101000636500018341#   |    2024.02.21 20:34

머리를 빗으며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을 때마다 슬슬 겁이 난다. 흰머리가 솟는 것이야 세월과 함께 당연한 순리이지만, 날이 갈수록 성글어지는 머리숱을 바라볼 때면 난감함과 함께 처량한 생각까지 든다. 한 올이라도 아껴보고자 조심조심 빗질을 해보지만 가을 낙엽 지듯 스르륵 스르륵 흘러내리면 가슴까지 섬뜩해진다. 추운 겨울…

#2024021401000385800011051#   |    2024.02.14 19:03

코뚜레

수십 년 전에 즉흥시 인터넷 사이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어느 누가 사이트에 글감을 던지면 말랑말랑한 시의 표정과 안색을 나열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어 너도 나도 즉흥시를 올렸다. 어느 새 이 재미에 빠져 든 나는 날마다 즉흥시에 꼬뚜레를 꿰었다. 늦은 밤에 글감을 툭 던지는 사람도 있어 무거운 쟁기 같은 한밤…

#2024020701000242900006451#   |    2024.02.08 10:51

마지막의 의미

여권 유효기간이 끝나 새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런데 여권을 받아 드는 마음이 참 착잡해졌다. 문득 이 여권이 내게는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신청서를 쓸 때도 약간의 그런 심란한 갈등이 있었다. 5년으로 할까 10년으로 할까. 그러다가 10년으로 했다. 10년이면 2034년이다. 그때까지 내가 살 수 있을까. 아…

#2024013101000989200030561#   |    2024.02.01 10:05

청룡의 해와 12지간

양력 1월 1일 새해가 되자 신문과 방송에서는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가 밝았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양력 1월 1일은 계묘년이다. 갑진년은 음력 1월 1일인 2024년 2월 10일이다. 12지간도 모르는 사람들이 청룡의 해라고 떠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2024년이 청룡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는 한자문화권으로 조…

2024.01.24 18:18

꿈을 꾸는 창(窓)

늦은 밤이면 남쪽으로 난 창문 앞에 자주 서 있곤 한다. 그곳은 앞 동네 아파트 사람들의 밤 정경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밤하늘과 들판, 그리고 사람 사는 곳의 화려한 불빛들이 어우러지는 공간은 가히 황금 분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조화로운 야경이다. 그곳에만 서면 왠지 별이 보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2024011701000560300016961#   |    2024.01.18 09:38

마른 오징어

파도를 벗고 바람을 껴입은 오징어를 수납장에서 꺼낸다. 하얀 가루에 제 아픔을 숨기며 얼마나 많은 상처를 억누르고 눌러왔으면 저리 바짝 말라 있는 것일까. 배를 가르는 어느 아낙의 손끝에서 바다의 시간은 버려졌지만, 아픔을 기억하는 등뼈는 아직도 단단하다. 막무가내와 어지러움을 켠 집어등 불빛을 만나기 전에는…

#2024011001000198200006111#   |    2024.01.10 18:18

마음에 남는 것

자금껏 살아오면서 아쉬운 것 중 하나가 아이들과 제대로 여행을 해보지 못한 것이다. 물론 잠깐씩 가는 여행이야 자주 했지만 며칠씩 같이 하는 여행은 못 했었다. 특히 두 아이의 아빠로 마흔이 넘어버린 아들과는 속내를 느끼고 나눌 만큼 며칠 함께하는 여행을 못 한 게 여직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린 어느 날 아이는 제…

#2024010301000099600003021#   |    2024.01.03 18:53

노파와 낙타

진눈깨비가 내리는 어두운 저녁에 시장 골목에서 낙타처럼 등이 굽은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어떤 노파가 폐지를 모으는 중이었다. 리어카에는 종이박스와 폐품들이 너저분하게 실려 있었다. 땅거미가 저문 늦게까지 리어카를 다 채우지도 못한 채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짠해 보였다. 10여 년 전…

#2023122701000852700024371#   |    2023.12.27 17:03

나의 ‘비밀의 화원’

내게는 틈이 날 때마다 드나들곤 하는 장소가 하나 있다. 제비꽃 아장거리는 볕 좋은 봄날 점심을 먹다가도, 연잎에 후두둑 소나기 듣는 한여름 오후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도, 억새 소리 서걱대는 늦가을 저물녘 둥지를 향해 날아드는 새 떼들을 바라보다가도, 입은 차림 그대로 마실 돌 듯 머물다가 오는 곳, 어등산 숲속의…

#2023122001000698400019501#   |    2023.12.20 22:25

선풍기

나와 삼십 년 넘게 동고동락하다 보니 선풍기는 이곳저곳이 망가져 있다. 선풍기를 튼다. 미풍이라는 푸른 갈기를 휘날리며 선풍기는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를 내면서 달리고 있다. 내 방에서만 사는 선풍기라는 저 푸른 말은 낭만이라는 초원으로 들어가는 법을 찾지 못해 말말뚝처럼 단단한 바닥에 매여 있다. 낭만의…

#2023121301000443300011901#   |    2023.12.13 18:07

사라진다는 것

전보(電報)가 없어진다고 한다. 없어진다는 말에 그냥 안타까운 마음이 된다. 이 나이라 느껴지는 허탈감이요 허망함일까. 없어진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이젠 두려움이다. 올해만도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이들이 얼마인가. 사라진다는 것은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이 세상에 …

#2023120601000200200004921#   |    2023.12.06 17:35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고향에 있었던 쌍사자 석등을 보려고 국립광주박물관을 찾아갔다. 예전엔 석등이 박물관 중앙홀에 있었으나 2층 전시관으로 옮겨져 있었다. 국보 103호인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9세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석등에 불을 밝히고 국난을 극복했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어두운 전시관 한쪽에 있었다. 원래 쌍사자 석등은…

#2023112901000883800025501#   |    2023.11.29 23:31

폐사지(廢寺址)에서

그곳을 처음 찾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새 30여 년도 훌쩍 지난 일이다. 산의 형세를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진 대나무 숲속에 하늘을 날 듯 날렵하게 서 있던 신룡동 5층 석탑. 마치 대관식을 하는 왕과 그 앞에 꿇어 엎드린 신하들의 광경이라도 보는 듯했다. 화순 ‘운주사’ 원시림 속의 불상과 탑들을 처음 보았을…

#2023112201000745700021341#   |    2023.11.22 17:24

뻥튀기

뻥튀기 아저씨는 시장 골목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 뻥튀기 맛을 기억해낸 골목의 입이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부부싸움하느라 밤새 몸집을 키운 소문도 여기로 오면 고소한 맛에 속이 풀려 입에 침이 고인다. 그만큼 이곳의 뻥튀기는 맛있다. 오후 시간이 한가한 나는 오랫만에 뻥튀기 내음으로 배를 채우는 골목…

#2023110901000322000008791#   |    2023.11.15 13:36

국화빵의 추억

세월이 흐르면 흐려지고 잊혀지는 것도 있지만 더욱 생생히 기억나고 더 그리워지는 것도 있다. 까맣게 잊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불현듯 떠오르는 것도 있고 또 그게 실마리가 되어 아주 멀고 오랜 세월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더 많은 것을 불러내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주 만나는 현상들이다. 그게 또 처음 만나는…

2023.11.09 14:35

달빛나루에서 윤동주를 생각하며

내 고향 광양, 섬진강 하구 달빛나루(津月) 망덕포구에는 윤동주(1917~1945) 시비가 서 있다. 그곳에는 ‘별 헤는 밤’ 친필 시비와 유고시 31편의 시비를 모아놓은 정원과 문학길이 있다. 윤동주 시비가 망덕 포구에 있는 까닭은 그의 유고시가 보존된 근대문화유산 제 341호인 정병욱 부친 가옥이 있기 때문이다. 망덕 …

#2023110101000072800001071#   |    2023.11.01 17:36

오두막 이름

십여 년 전, 뒷마당에 얼기설기 집 한 칸을 들어 앉혔다. 동네 위치가 호젓한 산자락에 자리한 데다 도시의 서쪽 나들목 부근이라 오명 가명 지인들이 드나들곤 한다. 가족 모두 오두막이라 부르던 그곳은 바로 그들이 이용하는 쉼터이자 찻집이라고나 할까. 누군가가 불쑥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살림집과는 별개로 홀가분하…

#2023102501000735800023421#   |    2023.10.25 17:19

옷걸이

옷걸이가 방 귀퉁이 못에 걸려 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목을 매겠다는 듯, 비장하고 단호한 흰빛으로 온몸을 감싼 채. 목까지 차오르는 삶의 물음표를 못에 거는 저 성찰의 자세가 결연하다. 옷걸이는 타인의 얼굴을 잘 걸치기 위해 자신의 눈과 귀를 지우고 입술을 뭉개며 버티는 어깨만으로 살아왔다. 타인의 안…

#2023101801000517500016451#   |    2023.10.19 09:01

반가워요

늘 하던 버릇처럼 차 안을 휘이 둘러 봤다. 드디어 책을 보는 젊은이 하나를 발견했다. 그게 그리 신기해 할 일도 아니건만 내겐 가슴이 콩콩 뛸 만큼 반가웠다. 궁금했다. 무슨 책일까.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책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차에서 책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저 고맙고 신기할 만큼 기…

#2023101201000297100009471#   |    2023.10.11 20:51

그날의 축제

그날 이태원에서는 광란의 축제가 있었다. 그동안 코로나로 열리지 않았던 할로윈 축제에 10만 인파가 몰려와 외국인 26명을 포함하여 156명이 압사하고 320명이 부상을 당했다. TV 뉴스를 보면서 대한민국의 치안과 위기 대응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 슬픔과 분노가 치솟았다. 축제는 참가자들이 일상에서 일탈하여 광…

#2023100401000090600003051#   |    2023.10.04 17:18

틀에서 벗어나기

넓고 자유로운 사고는 글을 쓰는 사람이 가져야 할 최상의 조건이다. 참신한 시선과 능동적인 표현 안에서 독특한 체취의 글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칠 때마다 번민이 일곤 한다. 정해진 규칙이나 격식에 스스로 얽매어 아등바등할 때도 그렇고, 부당함 앞에 쉽게 따지고 들 용기조차 못 내고 쩔쩔…

#2023092101000701400020501#   |    2023.09.20 23:56

말에도 각도가 있다

말(語)은 상대방의 귀에 다다르기 전에 자신의 각도를 먼저 잰다. 입안에 있을 때부터 말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혀 위에서부터 각도를 재기 시작한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복종을 요구하는 말은 90도 각도의 거만함이 혀에서부터 숨어 있다. 90도로 허리 숙이는 조직폭력배의 인사처럼 그 말에 실린 복종이…

#2023091301000428800012501#   |    2023.09.17 17:35

잘라가지 마세요

우리 집 앞에는 한 아름도 넘는 큰 포기의 수국이 아주 탐스럽게 자라고 있다. 그 싱싱한 푸르름과 등등한 기세는 3층인 우리집 창문에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기분을 좋게 하여 내 마음까지 밝게 해 준다. 지난해에는 거기서 피어오른 꽃봉오리들이 어찌나 탐스럽고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지 볼 때마다 내 입이 벙그러지곤 했…

2023.09.0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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