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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이트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 있고 사방은 고요했다. 왁자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홀로 빠져 나오기란 생각보다 쓸쓸한 일이다.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처지라니. 나는 거의 참석을 못 하거나 한다고 해도 중간쯤에나 갔다가 끝나기도 전에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반이라도 걸쳐놓고 집으로 오는 길엔 왠지 뿌듯…

2021.09.15 09:14

펭귄의 죽음

코로나가 만연한 올 여름은 매미소리가 지겨울 만큼 폭염이 극심했다. 지구 온난화로 이상 기온인데다 세계 곳곳에 산불이 발생하여 마치 지구가 불타고 있는 듯하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에서는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과 빙하가 지구 기온의 상승으로 녹아내리자 방수포로 덮고 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2021.09.08 00:32

비와 세월

여름의 뒷자락을 부여잡고 돌발적으로 찾아온 장맛비. 후텁지근한 대지를 그나마 시원하게 식혀줍니다. 징징하고 지루한 것이 장마라고들 하는데 반기지 않는 손님인 줄은 아는 모양입니다. 연일 보도되는 비의 난폭한 모습은 이제는 더할 수 없는 공포입니다. 기억 속의 비는 늘 설렘이고 기다림이었습니다. 지친 일상을 …

2021.09.01 00:23

울게 하소서

첫 손주가 태어났다. 새벽길을 재촉해 달린다. 서울까지 가려면 서너 시간이나 걸리는데 버스는 굼벵이다. 시간이 왜 그리도 더디 가는가. 마음속으로 버스를 채찍질하여 도착한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면회 시간에나 볼 수 있단다. 그 앞에서 바장이는데 때가 되자 신생아실 커튼이 걷힌다. 유리창 너머 아이는 눈을 감…

2021.08.25 08:45

어쩌다

어쩌다 나는 개와 노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을까?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는 네발 짐승에게 발목 잡혀 어쩌다 그의 반려 노릇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뿐인가. 요즘엔 고양이도 좋고 심지어는 까마귀조차 사랑스럽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공연히 즐겁다. 마음도 순해지고 맑아지는 듯싶다. 사람들을 만날 때 보다 그들과 …

2021.08.18 09:29

존재의 흔적

지난해 슬픈 별리가 있었다. 가까운 친척, 은사님, 직장 동료, 친구의 연이은 죽음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다정다감하게 지냈던 사람들과의 헤어짐은 작은 파도가 모여 큰 파도가 되듯이 슬픔은 상실감으로 이어져 며칠 동안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더구나 고인이 생전에 베풀었던 은덕과 지난 세월 아름다웠던…

2021.08.10 21:33

다리(橋) 유감(有感)

먹장구름이 몰고 온 세찬 빗줄기가 들끓는 대지를 시원하게 식혀준다. 정지되어버린 듯 나른하고 느릿하게 움직이던 전원의 여름 풍경도 본능적인 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오수(午睡)를 즐기던 뜰 안의 식구들 역시 수런수런 몸놀림이 빨라진다. 거미들은 처마 밑 천장에 바짝 붙어 집을 짓고 모기들은 비교적 흔들림이 작은…

2021.08.04 10:05

흔들리며 가는 길

승용차 대신 완행버스를 타기로 했다. 외진 바닷가로 가는 길이다. 손수 운전으로 인한 피곤도 덜고 차창으로 스치는 남해의 정취를 느긋하게 만끽하기 위해서다. 도심과 근교를 벗어나자 버스는 굽이진 길을 감돌며 잦은 정차와 출발을 해댄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처음 기대와는 달리 버스 안은 시금털털한 냄새를 풍긴다…

2021.07.28 00:52

모기 물린 밤의 상상

또 잠을 깼다. 까무룩 꿈속에 들었나 싶은데 그 틈에 또 한 방을 물리고 말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거푸 나를 노리는 게 괘씸하기 짝이 없다. 얇디얇은 이불마저 발밑으로 내쳐져서 내 몸은 거의 맨사댕이 상태지만, 설마 모기에게 헌사하고 싶었겠나? 일어나 불을 켜니 앵앵대던 소리는 간 데도 없고 부풀어 …

2021.07.21 10:04

환생

지난해 여름, 섬진강에서 큰 홍수가 났다. 집이 물에 잠기고 사람과 가축이 떠내려가면서 많은 피해를 주었다. 소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고, 수십 마리의 소떼가 531m나 되는 사성암까지 올라갔다. 구례 사성암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조사가 세운 암자로 신라시대 원효 대사, 의상 대사, 고려시대 도선 국사, 진각 국사가 …

2021.07.14 07:51

‘바람별 마을’ 촌장

“어릴 때 꿈이 무엇이었어요?” 지인으로부터 받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말더듬이가 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니 자라면서 무엇이 되어보겠다던가 또는 어떤 모습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산골 마을 딸부잣집 맏이로서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허기진 마음의 공…

2021.07.07 00:15

푸른 기적

귓바퀴 안으로 윙~ 하는 소리 흐른다. 눈언저리에 빛이 고인다. 머리끝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한 의식의 핏줄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죽음 같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손가락을 까딱대 본다. 육신의 실체가 느껴진다. 들숨을 몰아들이니 등판이 움직인다. 눈살에 희붐한 빛이 스며든다. 방안 주변을 헤아려 본다…

2021.06.29 23:50

나는 아무에게나 빈다

그날은 안개가 짙었다. 경치를 보자고 올라온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럴 지경이었다. 눈앞에는 한 무리의 군상들이 엎드렸다 일어섰다를 수없이 반복하는 중이었다. 사방은 운무에 덮여 있고, 보이는 것이라곤 예의 그 몸짓뿐이었다. 말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산마루까지 휘어…

2021.06.23 08:10

쓰레기 산, 쓰레기 섬

버리는 것은 모두 쓰레기이다. 집을 정리하다보니 불필요한 물건들이 많이 있다. 재활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도 있지만 대부분 폐품이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는 입지 않는 옷, 읽고 난 후에 쌓아둔 책, 낡은 가구, 애지중지 여기던 잡다한 물건들이 이제는 쓰레기로 버려야 할 것 같다. 게다가 매일 나오는…

2021.06.16 09:18

세월

먹고, 자고 또 늘어져 있기를 종일 되풀이하고 있다. 천성이 늘 움직이며 뭔가를 해야만 하는 남편까지 심신을 놓고 멀거니 있는 것은 큰 변화다. 애초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무엇을 해보자는 제안 한마디 없이 하루를 보냈고, 도드라지게 한 이야기도 없다.?서로가 있는 듯 없는 듯 조금도 불편하거나 거슬림 없이 집안의 …

2021.06.09 08:32

생을 벼리다

툭 또르르, 자정 넘어선 적막한 밤인데 이 무슨 소리인가. 이마가 서늘해지더니 목덜미에 침이라도 맞은 듯 신경이 곤두선다.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일 뿐인데, 이상도 하여라. 둔탁한 소리로 보아 말랑한 게 아니라 제법 딱딱한 물체일 것만 같다. 간밤 가까스로 잠 속으로 들어서는가 싶었는데, 툭 하는 소리가 귀청으…

2021.06.02 09:39

화전놀음 왔거들랑

엊그제는 ‘덴동어미화전갗라는 글을 읽었어요.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해마다 봄이면 야외로 나가 화전놀이를 즐겼대요. 거기에서 시작된 것이 ‘화전갗라고 해요. 이 글도 그중 하난데 읽고 나니 왠지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느낌이었어요.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돌아온 ‘내 누님’ 같은 얼굴. 그 표정이 참혹하게…

2021.05.26 10:21

보랏빛 사모곡

어버이날, 친정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설렘으로, 애틋함으로 이 길 위에 오르곤 했던가. 여자에게 있어 친정 나들잇길은 들판의 허수아비도 반갑다고 하는데 하물며 수려한 강산까지 펼쳐져 있으니….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아카시아꽃들이 들큼한 향기까지 내뿜으며 하얗게 하얗게 5월 산천의…

2021.05.19 00:19

민주광장에서의 메아리

민주광장에서 냄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미얀마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미얀마인들과 ‘미얀마 광주연대’가 ‘딴봉띠’를 재현하며 외치는 함성이었다. 딴봉띠는 냄비를 두드리며 악귀를 쫓는 미얀마 풍습으로 “군사 독재 물러가라!”는 의미로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 5·18민주광장에서 미얀마인들과 광…

2021.05.12 00:05

그 고샅 풍정

언제부턴가 한길보다 골목길이 더 마음을 끈다. 골목길은 콧노래 흘리며 걸어야 제격이다. 오순도순 동행하는 맛도 있지만 홀로 걷는 게 더 깊은 맛이 있다. 이런 골목길에서 우린 잔뼈가 굵고, 고물거리며 살다가 결국 그 길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가슴 가득히 번져 오는 길이 있다. 눈 감으면 물큰한…

2021.05.05 00:48

꽃 밟는 일을 걱정하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비는 개어 있었고 공기는 상쾌했다. 꽃들은 안녕하시겠지? 공원에는 벚나무가 많았다. 나무는 삽시간에 피어난 꽃들로 구름처럼 부풀어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벌들도 잉잉거렸다. 봄기운 창만한 그 아래를 나는 다시금 서성거려보고 싶었다. 공원길엔 벌써 꽃잎이 깔렸다. 어찌 하필 바람은…

2021.04.28 08:21

학마을 사람들

학처럼 평화롭던 마을이 재개발사업으로 시끄럽다. 학동 3구역 재개발사업으로 ‘무등산아이파크’가 들어서자 투기꾼들이 몰려오고 아파트 가격이 폭등했다. 이제는 4구역 재개발사업으로 학마을 사람들이 살던 집들이 허물어지면서 동네마저도 사라져버렸다. 마을의 역사가 소멸되고 이웃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학…

2021.04.21 00:29

달(月) 걸이 나무

집 안에서도 밤낮으로 다채로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 수 있는 홍복을 누리고 있다. 조금은 이성적이고 광막하게만 느껴지는 대낮의 하늘과는 달리 짙은 감성의 색채로 다가오는 밤하늘은 내게 늘 작은 배에 돛을 매다는 꿈을 꾸게 한다. 저뭇할 무렵 동네 산책을 하다가도, 싸늘한 바람결에 옷깃을 여미며 창문을 닫아걸다…

2021.04.14 07:57

동병상련

경칩 춘분이 지나자 움츠렸던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동물원, 원숭이 코끼리 사자의 우리 앞엔 구경꾼들의 발길이 오간다. 한데 말(馬)을 구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애잔해선지 호젓함에 끌린 건지 마사(馬舍) 앞으로 다가선다. 말은 무리에서 벗어나면 외로움을 탄다는데, 매화 송이 터지는 봄철인지라 더욱 그렇겠…

2021.04.07 00:39

아버지 생각, 술 생각

제사를 마친 아버지는 나에게도 술잔을 건네셨다. 나는 아직 예닐곱 살 꼬마에 불과했지만, 선뜻 잔을 받았다. 마시면 복을 받는다는 말에 저절로 이끌렸던 것일까. 아니면 의관을 정제하신 아버지 모습이나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함부로 거역할 수 없게 했던 것일까. 작고 붉은 목기에 담긴 그것은 겨우 혀끝을 적실 정도…

2021.03.31 01:01

두 개의 시계

인생은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 손목시계를 차고 다닌다. 그동안 여러 개의 손목시계가 있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가진 시계를 비롯하여 스위스에서 구입한 시계, 박사학위 기념으로 받은 금시계, 정년퇴직할 때 훈장과 함께 받은 대통령 휘장이 새겨진 시계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두 개…

2021.03.24 09:28

보따리 싸기

새벽부터 일어나 부엌에서 동동거리고 있다. 휴일이면 시골로 향하는 남편 손에 들려 보낼 반찬을 싸기 위해서이다. 음식 보따리를 꾸리는 일이야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요즘 부쩍 신명을 내는 것은 예전의 버릇이 도졌다고나 할까. 보따리에 대한 내 이력을 들춰보자면 제법 긴 세월을 거슬러야 한다. 동생들을 데리고 중…

2021.03.17 09:30

왜가리로부터의 상념

이슥한 밤, 생명이 에너지를 충전하여 영혼의 키를 한 뼘씩 키우는 시각이다. 어둠은 밝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밤에 다시 펼쳐 놓고, 그 사유의 뜨락으로 손목을 잡아 이끈다. 그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던 왜가리 한 마리, 먹이를 잡기 위한 모습이 아니었다. 두 발목을 강물에 서려두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

2021.03.10 10:20

마당에 대하여

오매, 요런 째깐한 데서 뭘 할라니까 옹색시러 죽겄네잉…. 설거지를 하다말고 나도 모르게 푸념을 쏟는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오늘처럼 김치라도 담근 날엔 주방 개수대가 유난히 좁게 느껴져서다. 물은 튀고, 큼지막한 양푼들은 주체하기도 어렵다. 마당이 있으면 할랑할랑 편하게 했을 일이다. 문득 숨어 있던 풍경 몇…

2021.03.03 00:12

아름다운 마무리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데,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이승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지난해 인생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있어 안타까웠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쩔 수 없더라도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 곱게 물든 저녁노을처럼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줄 알아야 한다. 몇 년 전…

2021.02.24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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