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무명천으로 사는 법-흑산도 기행

데스크칼럼/ 이연수(부국장대우 겸 경제부장)

2022년 10월 18일(화) 15:53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2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신안 흑산도는 맘 먹고 가기 쉽지않은 곳이다.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이는 섬은 기암괴석과 숲으로 이루어져 이곳이 유배지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배가 육지와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만큼 날씨 영향을 시시각각으로 받는데 바람이나 눈, 비 등 기상 상황에 따라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만다. 하지만 흑산도는 홍도와 함께 육지사람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섬으로 꼽는 곳 중 하나다.

홍어의 본고장. 11월부터 3월까지가 홍어 제철이다. 흑산도 홍어잡이는 그물을 사용하지 않고 ‘주낙’을 이용하는 생태친화적 전통어업으로 유명하다. 긴 낚싯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 홍어가 다니는 길목에 늘어뜨려 고기를 잡는 방식인데 지난해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됐다.

현지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현재 흑산도 홍어잡이 배는 7척 뿐이라고 한다. 겨울철, 한 번 조업하러 나가면 3일간 바다에 머물렀다 돌아온다는데 홍어 다니는 물길에 자리를 잘 잡으면 비싼 값을 받는 암홍어를 가득 싣고 만선으로 돌아온단다.

붉은 빛이 도는 쫄깃한 흑산 홍어를 맛본 사람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것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홍어와 잘 어울린다는 ‘삼합’은 삭힌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 수육에 묵은김치를 함께 먹는 요리인데 흑산도가 아닌 광주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흑산도에서는 삭힌 홍어가 아닌 싱싱한 홍어회를 맛봐야 한다. 여기에 막걸리를 곁들이면 ‘홍탁삼합’이다.

흑산도는 홍어 뿐만 아니라 영화와 책, 대중가요로도 유명해졌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에서는 “홍어 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는 어부 창대의 말에 정약전이 큰 깨달음을 얻고 창대의 도움을 받아 어보를 집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배우 설경구가 연기한 정약전의 명대사는 흑산도를 더욱 매력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혀도 마다않는 자산(玆山)같은 검은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라며 정약전이 생각하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있다.

영화보다 앞서 흑산도는 김훈의 장편소설 ‘흑산’의 무대이기도 하다.

‘거기, 그렇게 있을 수 없는 물과 하늘 사이에 흑산은 있었다. 사철나무 숲이 섬을 뒤덮어서 흑산은 검은 산이었다…’ 소설은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뱃길에서 시작한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흑산도 아가씨’ 가수 이미자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다. 흑산도를 유명하게 한 노래로 섬 사람들의 애환이 노랫말에 한처럼 서려 있다.

흑산도의 땅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소나무, 동백나무, 잣밤나무, 후박나무 등이 검게 뒤덮고 있는 섬은 서러운 세월을 꾹꾹 눌러밟은 듯 투박하고 거칠다. 정약전이 16년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사리마을을 둘러보노라면 유배당한 이들의 고립과 절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에서 구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보니 흑산도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바다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바다에서 건져올린 홍어는 주민들이 척박한 땅에서 먹고 살 수 있게 한 자산이 됐다. 흑산도 일주도로 열두 굽이길을 능숙한 솜씨로 주행하며 관광객과 섬 주민의 발이 되어 주는 공영버스 운전기사는 흑산도를 ‘홍어에 울고 웃는 곳’으로 표현했다. 흑산도로 오는 배에서 멀미를 했다면 홍어 아가미를 먹으면 멀미가 싹 가신다고 하는데, 오독오독 씹기 어려운 부위라 ‘믿거나 말거나’다.

세상이 답답할 때 흑산도로 훌쩍 떠나보자. 세상 끝이라 여겼던 곳에서 바른 삶의 전형을 보여준 정약전의 흔적과 도시와 다른 삶의 현장이 그곳에 있다. 겉보기엔 여유롭고 낙천적인 섬마을인 듯 보이지만 주어진 삶을 운명처럼 감내해 온 역사가 그곳에 숨쉰다. 바다 자원을 콘텐츠로 고립된 섬이 거주민의 100배가 넘는 관광객의 발길을 이끄는 이유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산어보’가 전하는 오늘날 우리 시대를 향한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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