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만 들면 그냥 할아버지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이는 나이일 뿐 외모로 보여지거나 법적인 나이 따라 그렇게 불려질 수는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최소한 손자나 손녀가 있어야만 할아버지가 된다. 말하자면 손주가 할아버지라고 불러줄 때에야 비로소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동생처럼 지내는 k교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한껏 들떠있는 목소리로 봐서 분명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답지 않게 한껏 호들갑스레 “저도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한다. 할아버지? 그게 뭐가 그렇게 요란스럽게 꼭두새벽부터 전화까지 할 사건인가. 그런데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대단하고 황홀한 사건이었다. 아직 아이 입에서 할아버지라고 불리지는 못했으니 진정한 할아버지는 못 되었다지만 법적으로 그는 분명 손자가 있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언젠가 지방에서 가진 문학 세미나에서 모 대학 총장을 지낸 작가와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그는 내게 한숨 가득 하소연을 했다. 남매가 장성하여 마흔의 나이를 넘었는데 결혼할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만나면 어떤 친구는 손자가 대학을 갔다고도 하는데 당신은 손주는 커녕 두 자식을 혼자서 늙게 할까 봐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손녀가 다섯이라는 얘기를 들은 후엔 내 손을 잡으면서까지 부러워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와 같은 일은 너무나도 많다. 옛날엔 스무 살만 넘으면 결혼을 하여 삼십 전에도 학부모가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결혼 연령이 설흔 살을 넘더니 요즘은 마흔 살이 넘어도 늦다는 생각조차 안 하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절 때 집안 식구들 모임엔 결혼 적령기를 넘기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싫다고 집에 가는 것조차 기피 하는 현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그런 얘기조차 금기사항이 되어버렸고 아예 비혼(非婚)이거나 독신(獨身)으로 살겠다고 선언을 해버리니 부모 입장에선 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달포 전 교회에선 장로 권사 집사 등 항존직(恒存職) 임직식이 있었다. 그런데 미혼의 권사도 있었다.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한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기야 미혼의 대통령도 있었잖은가. 이러니 k교수의 전화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저 할아버지 되었어요’ 하는 기쁨의 탄성에 나도 덩달아 축하하고 공감하는 바였다.

할아버지,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아름답고 행복한 호칭인가. 아무리 되고 싶어도 우선 자녀가 있어야 하고, 그 자녀가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한 그 자녀가 또 자녀를 낳아줘야만 할아버지가 되는 이 찬란한 자격획득을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일모레면 손녀들이 우리 집으로 모이는 날이다. 딸네 셋, 아들네 둘 도합 다섯이나 되는 손녀들이 “할아버지!” 하고 일제히 안겨 오면 세상이 온통 꽃 세상으로 된다. 어느새 중학생이 된 두 녀석은 조금 어색해하기도 하지만 내 키만큼 자라버린 아이를 가슴에 안고 보면 내가 오히려 그 가슴에 묻히며 안겨진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저마다 다른 음높이와 굵기로 연주해 내는 나만이 듣는 이 아름다운 합주는 할아버지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음악회다.

할아버지, 오늘은 k교수 덕에 나도 그 성스럽고 아름다운 호칭 속에 맘껏 행복한 웃음을 지어본다. 내가 듣는 “할아버지 저 왔어요” 시합이라도 하듯 목청을 돋우며 합창하는 이 아름다운 음악을 그도 곧 듣게 될 것 같아 카톡으로 축하 문자를 날려 보냈다. “할아버지 된 거 축하하네!” 다시 입이 함박만해 질 그를 속히 만나 함께 할아버지끼리의 대단하고 황홀한 기쁨을 같이 나눠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