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소슬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 탓이었다. 창망하게 드높은 하늘도 한몫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소화(素花)를 찾아 나서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쑥 길 위에 섰다.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로 가는 길, 주암호를 건너 석거리재에 이르는 동안 길가엔 코스모스가 온 힘을 다해 가을을 피워내고 있다. 흰 꽃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새끼 무녀 소화는 길섶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코스모스 같은 운명의 여인이었다. 고운 빛깔로 흐드러져 있어도 찬사만 보내고 지나치는 꽃 코스모스. 하지만 드센 비바람을 피해 꽃 숲을 헤치고 숨어든 단 한 남자를 위해 대궁이 뽑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태우는 정열의 꽃이기도 했다.

보성강 물줄기가 남도의 한을 품고 남해로 흘러드는 곳 벌교 포구. 그곳을 향해 고읍 들판을 쏜살같이 달리다 보니 읍내 초입에 홍교가 자리 잡고 있다. 홍교는 빨치산 염상진이 지주들에게 쌀을 수탈해다가 인민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쌓아두었던 곳이기도 하다.

천변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니 ‘부용교’라고 적힌 돌다리가 반긴다. 일명 소화다리(昭和橋)임을 한눈에 짐작하게 한다. 무녀 소화가 오롯이 사랑했던 남자 정하섭을 위해 몸 깊숙한 곳에 밀서를 품고 부들부들 떨면서 건넜던 다리.

“솔찬허시!”

다리 위에서 만난 소화에게 음흉한 눈빛으로 추파를 던지던 염상구의 모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체와 핏물이 질펀했다는 다리 밑에는 얼룩진 상처 대신 폐수가 콸콸 쏟아지고 있다.

고개를 들어 순천 쪽을 올려다보았다. 무녀 소화가 살았다는 진트재 너머 재석산 자락을 타고 은밀히 숨어든 정하섭과 소화의 불타오르는 사랑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영문도 모른 채 고모와 조카 사이라는 원죄에 갇혀야만 했던 그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소화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 큰무당 월녀와 정하섭의 할아버지 정 참봉 사이에서 세상 빛을 본 사생아였다. 그런 그녀를 두고 “붉은 꽃이 되려고 제 심장을 빼냈으며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피어날 수 없어, 눈멀고 귀 닫혀 얼굴 붉힌 봄날은 가고 말았다”고 했던 어느 시인의 시구절이 아프게 파고들었다. 이념도 사상도 그 무엇도 모르지만, 백성을 위하는 일을 한다는 정인(情人) 정하섭을 향해서 끝없는 다리를 건넜던 소화. 그녀는 어린 시절 비파 두 개를 쥐여주며 너같이 예쁜 아이가 왜 무당 딸이냐고 아쉬워하던 첫사랑 정하섭의 운명에 꿰어진 염주알이었다. 손에 꼭 쥐고 펴보지 않은 비파알 같은 사랑. 소화의 사랑을 향한 다리 건너기는 일방통행뿐이었고 되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거기에 목숨을 바친다 해도 오히려 행복이었으며, 정인(情人)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럴 때 벌교의 토속어로 이렇게 표현했던가.

“아즘찬이, 아즘찬이, 또 아즘찬이.”

십여 개도 넘는 다리를 건너 어김없이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길, 주암호의 가을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