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신드롬

글 조세핀 시인

어느 해 가을이었다. 오후의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햇살 샤워를 즐기는 중이었다. 때마침 하늘로 솟은 전봇대의 전선을 타고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 했다. 정수리에서 발가락 끝까지 전율이 일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왜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몽롱해졌다. 한참 동안 흘러나오던 음악이 낙엽처럼 바닥으로 내려앉자 정신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 순간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면 대꾸는커녕 모른 척 해서 오해를 샀을 것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언제나 라디오를 켜는 습관이 있다. 정신이 없었던 그날도 어김없이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라디오의 채널은 늘 FM92.3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때 깊은 목소리로 프랑스 오리지널 뮤지컬 팀이 광주공연을 앞두고 있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주제곡이 바로 이어졌다. 캬! 비명이 절로 나왔다. 바로 조금 전 거리에서 몸과 마음을 바닥에 묶어버린 그 음악이었다. 조금 과장해 정신 줄을 들었다 놨다 했던 음악의 정체는 다름 아닌 뮤지컬 ‘노트르담 파리’의 주제곡이었다. 겨우 진정시켰던 마음이 그 웅장함에 다시 부풀어 올랐다. 북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날의 특별한 경험은 일종의 스탕달 신드롬인 것 같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겪었던 그날의 오묘한 현상은 살면서 자주 경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물론 감성이 섬세한 나는 그 이후에도 여러 번의 기억이 있긴 하다. 수위는 조금 낮았지만 영화를 보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작가나 주인공에게 쉽게 동화되어 정신을 못 차릴 때가 있다. 때론 손가락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에게도 마음을 온전히 내놓고 만다. 스탕달이라는 작가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다가 혼미함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를 보면 꼭 거대한 예술 작품에서만 그런 감동을 얻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백석의 시를 좋아한다. 오래 전 〈수라〉를 읽었을 때의 감흥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검은 활자 하나하나가 걸어 나와 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말이다. 며칠을 읽고 또 읽었다. 읽을 때마다 명치 아래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얼마나 많이 쏟았는지 모른다. 어느 날은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온 것도 모르고 수라에 빠져 있었다. 아이는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영문도 모른 채 함께 울었다.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다보니 아이가 더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이에게 시를 읽어 주었다. 듣고 있던 아이는 새끼거미가 불쌍하다며 한참을 훌쩍였다.

낙엽이 하나 둘 밟히는 계절이다. 사각거리는 낙엽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 해 조금은 미안하고 고맙다. 쑥스럽지만 나는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은 행운이다. 작은 것은 늘 함께 하는 것이다. 늘 함께 하기에 대체로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곁에 있어 존재감이 없는 것들을 잠시 떠올려 본다. 사람은 물론이고, 살아있든 살아있지 않든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자 그 나름의 쓸모가 있고 나름의 의미가 있고 그 나름 소중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오늘도 나는 아침 산책길에서 비에 젖은 낙엽을 만났다. 출구 없는 그의 곁에 한참을 머물러 있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수라를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