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중 가장 마음이 급해지는 달이 동짓달일 것 같다. 동짓달은 그 해의 달력 마지막 한 장을 남기기 전의 달이기에서만이 아니라 올 한해도 다 가고 있네 하며 한 해의 끝을 실감하는 때여서이다. 하지만 내게 동짓달은 또 다르다. 바로 내가 태어난 시작의 달이면서 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마지막의 달이기 때문이다. 벌써 70년도 더 된 옛일이지만 나는 동란 중에 전라도 나주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내가 태어난 그달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 온 지 14일 후에 아버지가 가셨다. 핏덩이였으니 아버지를 봤다 한들 알아보기나 했겠는가만은 나는 아버지와 단 한 번도 만나볼 수 없이 상사화처럼 서로를 보내고 말았다. 모르겠다. 아버지께선 마지막에 의식이 있으셔서 당신 대신의 씨앗 하나가 싹이 텄다고 스스로 위안이라도 삼으셨는지는. 여하튼 나는 동짓달에 태어났고 그것은 새로운 불행한 역사의 시작처럼 예감되었다. 물론 그 또한 당사자인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 나이 스물아홉, 어머니 나이 스물여섯, 요즘 같으면 아이들이라 할 그런 나이였는데 내 위로 태어났다는 형이 떠난 지 1년 만에 내가 태어났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어려서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 얼굴도 모른다. 내 세 살 때 가신 어머니, 그 또한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 없다.

그런 내게 11월 동짓달이 특별한 것은 내 삶의 노래 속 가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돌 달에 아버지를, 세 살때 어머니를 잃은 천애고아인 외손자를 떠안겨 받은 외할머니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당신도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데 이 핏덩이 같은 외손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집안에선 제 핏줄을 찾아 보내라고 목포의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에게 연락까지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이 어린 것을 어떻게 보낼 수 있느냐며 말이라도 제대로 하고 걸음이라도 제대로 걸을 때까지만이라도 당신이 키우겠다고 억지를 부리셨단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내 귀에 대고 ‘동짓달 열이틀 저녁밥 먹는 시’라는 노래를 가르쳤다. 혹시라도 당신이 어떻게 되어 나 혼자가 되더라도 ‘생월생시도 모르는 근본도 모르는 놈’은 되지 말라고 눈만 뜨면 내 귀에 대고 가르치셨다고 한다. 그렇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깨우치자 맨 먼저 큼지막하게 종이에 써서 안방 자리 밑에 넣어두고 내게 읽게 하셨다. 그런데 할머니의 노래가 하나 더 늘었다. 우리 원현이 초등학교 졸업하는 것만 보고 죽게 하소서. 중학교 입학하는 것만 보고 죽게 하소서. 중학교 졸업하는 것만 보고 죽게 하소서. 그런 할머니는 내가 결혼하여 첫 아이를 안겨드린 후 여든일곱으로 가셨다.

할머니가 가신지도 40여년이 되었다. 그 할머니가 근본도 모를까 봐 노심초사 하셨던 그 생일을 일흔 번이 넘게 맞고 보냈다. 며칠 후면 또 내 생일이 돌아온다. 코로나로 칠순 여행도 못 가긴 했지만 어김 없이 딸네 다섯, 아들네 넷에 우리 부부 해서 열하나의 우리 가족은 이 동짓달에 또 다 모일 것이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다섯 손녀에게서 받는 축하의 말이 내겐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이다. 동짓달 열이틀 저녁밥 먹는 시, 내 정체성을 밝히고 내 존재감을 인식시킨 할머니의 교육법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교육법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 교육법으로 이만큼 바르게 밝게 자랐고 또 이만큼 아이들의 아버지요 할아버지로 살고 있다. 해마다 11월 동짓달이 오면 할머니가 더욱 그립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 그리고 아무런 추억거리도 없는 어머니 곁으로 가야 할 날도 멀지 않을 나이에 이르러 새삼 ‘동짓달 열이틀 저녁밥 먹는 시’를 할머니 노래로 듣는다. 할머니 그립습니다. 엄마 보고 싶어요.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단 5분/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던 정채봉 시인의 마음이 문득 내 마음인 것 같아 큰 소리로 불러본다. 할머니!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