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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역에서 만나는 그리움의 열매 하나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2022년 03월 09일(수) 16:06
사람이 다녀야 길이 된다. 수없이 많은 오고 감이 길을 만든다. 기찻길에도 탈 사람이 생겨야 역이 생긴다. 통행이 끊기면 길도 역도 기찻길도 없어진다. 그렇게 없어진 길이며 기찻길과 역도 많다. 흔적이라도 남긴 폐역과 철길은 반갑다. 그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때문이다. 그리움은 슬픔의 색깔을 띠는 것 같다. 그 대상을 바라보거나 생각만 해도 눈가가 촉촉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정표를 만났다. 벽제역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 순간 화살표 방향으로 핸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한데 거기서 만난 폐역, 어찌 이리 망가져 버릴 수 있나. 참으로 너무하다 싶다.

가끔 간이역을 찾아다니며 만나는데 이렇게까지 방치된 역은 처음이다. 역사(驛舍)인지도 구분이 안 될 만큼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벽제역이라는 빛바랜 역명 표시가 겨우 역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참으로 작은 역이기도 하다. 벽제 화장터가 있었고 군용열차도 가끔씩 정차했다는데 서럽도록 왜소해 보이는 모습에 찡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사람 발길이 끊기면 자연으로 돌아가 진다는데 이곳은 그도 아니다. 길게 펼쳐진 녹슨 철길로 눈길을 주는데 유리가 깨진 채 멈춰 서있는 시계 하나가 무슨 말이라도 걸어올 듯 나를 바라본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2011년 폐역 전부터였을 것이다. 역사임직한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선인장들이 벽에 붙어 말라 있다. 돌보는 이 없으니 여름도 아닌 겨울에 어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말라 죽은 선인장에서 보일락말락 한 잔가시들이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켜내려 했다는 듯 겨울 햇살 속에서 뾰족이 빛나고 있다.

1961년 역사(驛舍)가 신축되고 배치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여 1964년 보통 역으로 승격했으나 1983년 무 배치 간이역이 되고 1986년 소화물에 이어 1995년 화물취급까지 중지되었단다. 2004년 여객 취급 중단 후 2015년 공식적 폐역이 된 벽제역은 쓸쓸하고도 황량한 모습이다.

폐역은 온통 그리움이다. 잊고 버려진 안타까움을 가까스로 달래면서 전성(全盛)의 한 때를 회상하는 듯 했다. 그가 떠나는 정거장에서 홀로 남게 되었을 때나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나와본 역에서 기차만 멈췄다 가버릴 때의 허허로운 가슴 같은 것, 그게 간이역이다. 안 올줄 알면서도 뭐 하러 나왔을까 후회도 하지만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간절함이 있는 곳 그래서 안타까움으로 그리움을 키우고 그리움으로 안타까움을 달래는 곳이 간이역인데 그마저 폐역이 되었다.

봄이 오면 차가 다니지 않는 철로엔 이름 모를 풀꽃들이 저마다의 삶을 펼칠 것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시간의 흐름 앞에선 막막하고 안타깝기만 하리라. 그래서일까. 폐역에는 시간조차 범접할 수 없는 묘한 침묵만 흐르고 있다. 거기 그리움이라는 열매 하나가 덩그마니, 열려 있는 문고리에 폐역의 상징처럼 매달려있다. 그게 세월이요 삶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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