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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문

박덕은 문학박사·화가·전 전남대 교수

2022년 02월 16일(수) 17:11
세상과의 문을 닫고 한때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둔한 적이 있었다. 세상과의 문을 닫으니 또 다른 문이 열린 걸까. 그 문은 의외로 들고양이와의 인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사는 집 뒤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있었다. 하루는 그 개울물 따라 걷고 있는데, 넙적바위나 뎁히는 심심한 대낮의 햇발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초조한 응시를 내려놓은 채 나른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후 3시의 느긋함을 방패 삼아, 하릴없는 무료함이 주는 묘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경계심은 허공의 바닥으로 내던져 놓고서 고양이는 벌러덩 누워 자고 있었다. 내가 이뻐하는 들고양이 ‘아이리’였다. 나는 고양이가 깰까 봐 조심조심 걸었다.

‘아이리’와의 인연은 지난겨울부터였다. 하루는 아침밥 먹고 마루에 나앉아 있었다. 마당 가득 소복히 쌓인 눈 위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시골집을 본 듯 신기해하며 왁자하게 떠드는 흰빛이 여기저기서 반짝였다. 그렇게 함박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들고양이 한 마리가 마루 밑까지 오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의 어떤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듯싶었다. 경계심을 벗어 놓은 고양이의 눈빛은 아주 순해 보였다.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야금야금 숨을 핥는 다가섬도 없이 고양이는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트 목걸이가 있는 걸 보면 고양이는 한때 어느 따스한 집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뒤로하고 지리산 자락으로 흘러 흘러 들어왔을 것이다. 저 순하고 간절한 눈빛이 될 때까지 그렁그렁 눈물 맺힌 밤에는 먹먹한 혀를 꺼내 털에 배어든 아픔을 오랫동안 핥으며 닦아냈을 것이다. 닦으면서 질긴 슬픔을 맛보고 혀끝에서 뭉그러지는 비릿한 숨을 삼켰을 것이다. 생의 한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밀려난 고양이는 가슴에 박힌 가시뼈 때문에 컥컥거리며 밤을 지샜을 것이다.

들고양이를 통해 내가 힘들게 걸어왔던 길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고양이의 배는 홀쭉했다. 배가 고픈가 싶어 냉장고에 있는 돼지고기 몇 점을 꺼내 갖다주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이후 고양이와 친해졌다. 그때부터 일부러 시간을 내서 정육점에 갔다. 팔지 못하고 버리는 돼지고기 비계 부위를 얻어와, 아이리한테 주기 시작했다. 닫힌 마음의 문은 고양이에게 곁을 내주면서 틈이 생기고, 그 문틈으로 따스한 빛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도 한때 예리한 발톱을 드러내는 고양이科였던 적이 있었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냉소적으로 다가가, 날 선 발톱 같은 교만으로 상대방을 할퀴곤 했다. 우스갯소리로 발톱 교묘히 숨겼지만, 비수처럼 날카로운 교만에 상대방은 상처를 입곤 했다. 그러다 내 미래의 새벽까지 날카로운 발톱에 생채기가 났다. 그 후로 나는 내 마음의 벼랑 끝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끝도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는데, 고양이와 친해지면서부터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런 고양이가 사랑스러워 ‘아이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리’는 I love you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지리산의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그날도 함박눈이 내렸다. 함박눈은 아이처럼 즐거운 비명이라도 지를 듯 팡 팡 쏟아졌다. 방안까지 쌓이는 야옹야옹 소리에 아침의 귀까지 즐거웠다. 여느 때처럼 아이리에게 돼지고기를 주려고 방문을 열었는데 고양이들이 방문 앞에 쭈욱 줄 지어 앉아 있었다. 아이리가 동네방네 내 얘기를 해서 고양이 친구들이 놀러왔나 싶었다. 나는 그런 아이리가 귀여워 돼지고기를 넉넉히 챙겨주었다. 지리산에 들어올 적에 내 마음의 여백은 없어서 아침이 눈뜨는 자리는 허허롭고 쓰렸다. 하지만 아이리와 시작된 인연의 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아침의 안쪽으로 흘러들어 쌓이는 야옹야옹 그 소리가 온기를 돌게 했고 심장을 뜨겁게 했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시골집이라 푸세식 변소가 마당 끝에 있었는데, 고양이들이 졸졸졸 내 뒤를 따라왔다.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 고양이들이 내 주변을 에워싸더니 엉덩이에 바짝 붙어 앉았다. 엉덩이 털옷을 만들어 찬바람을 막아 주려는 아이리와 고양이들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나와 아이리의 인연으로 새로운 문이 활짝 열렸다. 오돌오돌 떨며 서 있던 아픔의 문은 서서히 닫히고, 따스한 울림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문으로 다시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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