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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맛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2022년 01월 26일(수) 18:08
이 나이에도 이상스레 고향이란 말만 들으면 설렘이 인다. 아니 설렘이라기보단 그리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기억에서조차 멀어져가는 것, 그런 걸 붙잡으며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때론 너무 안타깝고 그런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기까지 한다. 속수무책 바라만 볼 뿐 아무것도 어쩌지 못하는 무능함 같기도 하고 지레 겁을 내며 속절없이 포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보이는데도 잡을 수 없고 가까워 보여도 멀기만 한 별을 보는 것처럼 아련한, 내게는 그래서 더더욱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고향의 깨복쟁이 친구가 느닷없이 선물을 보내왔다. 내가 좋아하는 봄동이 커다란 한 상자다. 사실은 매년 이맘때면 받아먹었던 게 몇 해째 될 것 같다. 하지만 그가 하던 일을 바꿨다기에 금년부턴 못 할 줄 알았는데 또 보내온 것이다. 느닷없다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던 차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봄동을 보자 어이없게도 갑자기 눈물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 외할머니는 마당가 텃밭에 심은 배추로 김장을 하셨다. 한데 내 도시락 반찬의 김치는 다른 애들 것과 달랐다. 내 것은 거무튀튀한 파란 배추김치인데 아이들 것은 하얗게 먹음직스러웠다.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 반찬통을 가리고 밥을 먹었다. 나도 저런 김치를 먹어보고 싶었지만 우리 텃밭의 배추는 그렇게 포기가 지는 것이 아녔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김치에 대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가슴 밑바닥에 서러움처럼 꿈틀댄다.

보내온 봄동은 하필 속이 들지 못하고 사방으로 잎을 펼친 그때 할머니의 배추였다. 순간 할머니가 생각나 가슴이 아리다. 그만큼 어린 날 고향 추억 속에 자리한 강한 기억이었던 같다. 사실 내게 고향은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6·25가 나자 경찰관이셨던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는 나주의 친정으로 피난을 가셨고 난 거기서 태어났다. 그렇게 외가가 내 고향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지 1년 된 돌 달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태 후 세 살 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천애 고아가 된 외손자를 눈물범벅으로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엄마가 되어 키우셨다. 외손자를 키운다는 주홍글씨로 수많은 눈총과 집안 대소가의 질시와 힐난에도 당신만은 내 의지가 되어줘야 한다며 화살받이가 되고 바람막이가 되고 갑옷이 되어주셨다. 결국 나만을 위해 모든 걸 다 놓아버린 채 급기야 나만 데리고 나가셨다. 그리고 엄동설한에 흙벽 집을 지어 내 중학교 입학을 대비하셨다. 그렇게 중학교까지의 유일하고 온전한 내 바람막이가 되어 주셨다.

외손자를 이뻐하려면 경상도 방아 코를 이뻐하라는 말도 있는데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할머니의 삶은 얼마나 춥고 아팠을까. 하지만 그런 가시 같은 나를 가슴에 안고 찔리면서도 키우셨던 할머니셨다.

외할머니는 내게 어머니요 하늘이었다. 그런데 철없던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싸주신 도시락 반찬 투정을 하고 그걸 부끄러워하고 서러워하고 원망스러워했었다. 그것밖에 해 줄 수 없던 할머니의 가슴은 까맣게 숯덩이가 되었을 텐데도 말이다.

보내온 봄동을 한 포기씩 씻어 쌈으로 먹는다. 고향 것이라서인지 금년 것은 더 연하고 맛이 좋다. 좀 거칠고 억센 듯 보여도 한 입 베어 물면 아삭한 맛이 그만이다. 약간은 거칠고 억센 맛을 나는 즐겨 먹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입 가득 먹는데 전혀 아닐 텐데도 문득 할머니의 김치맛이 느껴져 또 주책맞게도 눈물이 그렁해진다. 생긴 것은 그랬어도 맛만은 지금도 생각나는 꼭 내 입맛이었다. 봄동 같던 할머니의 김장배추, 아니 내 어릴 적 고향 맛이 새삼 그리움으로 미각샘을 건드린다. 고향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듣게 하며 삶의 행간을 맞춰준다. 그래서 실패하고 힘들고 어려운 때에도 제일 먼저 떠오르고 가고 싶고 생각나는 곳이요 입맛을 잃었을 때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맛이다. 친구가 보내준 봄동이 잊고 있던 아련한 고향 맛 어린 날의 서러운 할머니의 김치맛을 살려내 안타까운 그리움 내로 솔솔 피어난다. 할머니 맛, 친구의 봄동 맛, 고향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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