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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녘

탁현수 수필가·문학박사

2022년 01월 19일(수) 17:32
울부짖듯이 웅웅거리는 거친 비바람 소리. 해마다 이맘때의 바람은 하룻밤 사이 온 들녘을 발가벗겨 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웬일인지 모두가 찬사를 던지며 방방곡곡 단풍 구경을 떠날 때는 잠잠하다가도 겨울을 몰고 오는 대지의 가쁜 숨소리에는 잠자코 한 자리에 머물 수가 없다.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를 휘돌아 나오는 바람을 맞으며 빈 들판에 서 있노라면, 오히려 안도의 깊은 호흡이 터져 나온다.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벗어주고도 초연히 드러누워 있는 빈 들녘. 그 허허로운 겸허에는 시작과 기도를 잉태할 수 있는 웅숭깊은 아량이 담겨 있다. 예고도 없이 몰려다니는 바람의 심술도 온 가슴으로 쓸어 담고, 어귀에 서서 숨 가쁘게 나부끼는 억새꽃 무더기까지 마지막 생명을 태울 수 있도록 보듬어 안은 모습은 가히 성자(聖者)의 경지가 이러할까.

휘적휘적 은빛 너울을 출렁거리는 억새꽃을 헤집어 부드러운 솜털을 가만히 얼굴에 대어 본다. 순간,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뭉클하게 토해지는 단어 하나.

‘어머니….’

오늘 그토록 빈 들녘을 헤매었던 실체는 어머니 때문인 듯하다. 시가(媤家)와 남편에게 충실 하라는 말씀이 전부인 걸로 알고 친정은, 아니 어머니는 늘 뒷전이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라고 편할 대로만 생각했다.

내 어머니 역시 누군가와 마주하면 뭘 해줄까, 뭘 먹게 할까, 어떻게 해야 상대가 편안할까만 생각하며 평생을 사셨다. 호랑이 같은 남편 수발에 끊이지 않던 손님 접대는 그만두더라도, 시부모님과 시누이 넷, 그리고 자식들 8남매로도 모자라 전쟁고아가 된 친척들까지 건사를 했으니 그 세월이 어찌하셨을까.

맺은 인연이 많아서인지 떠나보내는 일도 이골이 나게 하셨다. 시부모님을 정성껏 보내드리고, 시누이 넷과 친척 조카 셋을 짝지어 분가시켰으며, 그 많은 자식들까지 모두 어머니 곁에서 떼어놓았다. 하나하나 보낼 때마다 온 힘을 다하였으나 호들갑스럽지 않고 천연하셨다. 보낼 때 그리하였듯 구순의 연세에도 자식 중 어느 하나 곁에 있을 수 없는 현실까지 당연하게 수용하신다.

어머니 앞에 서면 바람도 출렁임도 없는 깊고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한동안은 사람이 어찌 그리 무던하고 한결같을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때로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신 곁의 모든 것들을 여름 장마에 쑥쑥 자라게 하고, 가을볕에 잘 여물도록 돕기 위해 평생 부산하셨던 어머니. 추수가 끝나버린 지금, 어머니의 빈 들녘에는 긴 고요가 감돌고 있다.

나는 믿고 싶다. 그 빈 들녘에는 최선을 다했던 세월만큼의 그리움과 꿈이 있어서 그렇게 허무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좌절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부지런히 뭔가를 찾아 이루어 내곤 하신 어머니의 자생력을 지금껏 보아왔기에 말이다.

어젯밤 어머니의 전화 음성을 들었다.

“나는 괜찮다. 너희들이 아플까 걱정이지.”

강건한 척하셨으나 어머니의 음성에서 마른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살면서 어느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여자라는 사실도 잊고 살았다. 정작, 어머니의 얼굴에서 화장기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오히려 어머니가 나와 같은 여자였음을 통감했다.

불현듯 오늘 황량한 빈 들판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겨울의 기나긴 밤을 지새우고 계시는 어머니의 들녘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는, 우리들의 유년과 어머니의 젊음이 담겨 있고, 그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억센 바람 소리로 표현해도 진실한 노래로 들리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꺾이지 않는 억새꽃 같은 어머니. 그 은근과 끈기로 새봄의 싹을 틔우는 인내를, 오늘 빈 들녘에서 아니 어머니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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