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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박덕은 문학박사·화가·전 전남대 교수

2022년 01월 12일(수) 17:24
밤새 누가 그리움이라는 그믐달을 손가락 끝에 앉혀 놓았을까. 인연이 다해 몸밖으로 떠밀린 손톱. 몸에 새겨진 이별의 흔적은 쓰리고 저려, 시간이 흘러도 손톱처럼 자라 그날의 상흔을 다시 끄집어낸다.

첫사랑, 그녀와의 인연은 보름달처럼 환했다. 아득한 나의 먼먼 인생 항로까지 환하게 밝혀 줄 것 같았다. 그녀와의 아름다운 추억은 보름달빵 같아 한입 베어 물면 달달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스며들지 못한 비릿한 말들이 얽히면서, 그녀는 그녀를, 나는 나를 각자 변명하기 바빴다. 아픔과 아픔이 맞물리면서 생각과 감정이 따로따로 자기 안에서 고집스럽게 숭배되었다. 깊게 파인 상처에 공감의 혈(穴)이 흐르고 이해의 맥박이 뛰어야 비로소 한 시절이 완성되는데, 우리는 하나의 파격으로 뒤섞이지 못했다. 어느 순간 보름달은 반으로 접혀 반달이 되고, 반달은 다시 그믐달로 이울어 갔다. 보름달과 반달 사이에서 주고받았던 우리의 미소는 달빛으로 채 물들기도 전에 불안을 토해냈다.

하루는 그녀가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그날따라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매니큐어를 바르고 나왔다. 반짝이는 매니큐어가 예뻤지만, 손톱 안의 반달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 반달은 생의 반쪽과 같은 느낌이어서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반달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완성할 수 있는 미완의 운명과도 같아서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때, 반달은 열 손가락 끝에서 환하게 꽃피어났다. 그 하얀 반달은 그녀와 나만의 내밀한 영토이기도 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던 달콤한 귓속말과 설익은 내일이라는 씨앗을 그곳에 심었다. 공중을 달막거리는 바람의 노래와 통통 튀는 설렘으로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가꾸었다.

여행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 뒤, 호숫가를 산책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지금 최고로 행복해. 이렇게 행복할 때 헤어지고 싶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줘.”

숨이 턱 막혀 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오랜 시간 그녀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줄임표로 나의 하소연을 건너뛰었다. 건방진 이별만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호수 위로 무사의 칼처럼 날카로운 달빛이 내리꽂혔다. 호수가 달빛에 가슴을 베이며 하얀 피를 쏟아냈다. 만개한 통증이 수면을 수놓았다. 호숫가를 떠나려고 하는데 그녀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업어 줘.”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업고 한참 동안 호숫가를 거닐었다. 평소에 그녀는 내 등에 업히는 걸 좋아했다. 그녀는 나에게 업히면서, 나는 그녀를 업으면서 우리의 빈집 같은 하루 속으로 봄이 오고 새소리가 깃들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그 모든 것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은 나의 간절함이 그녀를 업은 두 손에 짱짱히 실렸지만, 그녀는 이내 내 등에서 내 삶에서 영원히 내려왔다.

그녀와 헤어진 후 수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며 살아갔다. 하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반달이 떠 있었다. 그녀와 나만의 내밀한 영토였던 그때 그 반달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그녀의 달콤한 귓속말은 여전히 반달처럼 환했다. 그리움으로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육 년 반이 흐른 어느 날, 그녀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커피숍에서 30분쯤 기다렸을 때, 그녀가 맞은편 길에서 건너오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아기가 안겨 있었다. 커피숍 문 앞으로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내가 아기를 안자마자 아기는 방글방글 웃었다. 커피숍에 앉아 얘기를 나눴지만, 나와 그녀 사이에 보름달처럼 환한 아기의 웃음이 가로놓여 있었다. 아기는 달빛 흘림체 같은 침을 흘렸고 나는 손수건으로 입가에 묻은 그 흘림체 낙서들을 닦아 주었다. 나는 이제 저 환한 보름달 같은 아기의 웃음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영영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를 잊기로 했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난 지 만 6년 6개월째 되는 날이었다.

마지막 그리움 같은 그믐달 모양의 손톱을 깎는다. 뚝뚝 잘려나간 그리움들. 인연의 끝자락에 머물렀던 첫사랑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진다. 새 손톱이 자라듯 그믐이 지나면 언젠가 새로운 인연의 초승달은 다시 뜰 것이다.
지붕 위로 달이 기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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