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찾기 추가
닫기
빨간모자

김향남 수필가·문학박사

2022년 01월 05일(수) 18:08
우리 동네 과일 파는 아저씨는 항상 빨간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동네가 막 생겼을 때부터였으니까 올해로 근 20년이다. 그는 변함없이 길거리 노점에서 과일을 판다. 계절에 따라 종류는 달라져도 머리 위의 모자는 언제나 한가지다. 내가 아는 한 그는 한 번도 다른 색깔의 모자를 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벗은 적도 없다. 빨간 모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과일에 관한 한 그는 자타 공인 전문가다. 작은 키와 다부진 체구,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그가 파는 과일들까지 야무져 보이게 한다. 그가 골라주는 과일은 정말로 맛도 좋다. 한 번도 엇나간 적이 없다. 머리 위의 빨간 모자와 기운찬 음성과 상큼한 과일들의 조합. 그를 믿고 찾게 되는 이유다.

그가 장사를 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말 하루를 제외하고는 항상 그 자리를 지킨다. 아파트를 나와 상가 쪽으로 가면 덩치 큰 빌딩들이 우람하게 서 있고, 그 아래 인도에는 노점들이 즐비하다. 그는 빌딩 벽을 배경으로 벽화처럼 존재한다. 그는 살아있는 그림이다.

어느 날, 문득 그 자리가 휑해 보였다. 거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뭔가가 빠진 듯 허전해 보이는 것이다. 뭘까? 아, 그러네! 나는 단박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챘다. 무슨 일일까? 나는 바지런히 주변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 다른 데로 간 걸까? 더 목 좋은 곳을 찾아서? 아니면 새로운 일자리라도 생겼나? 아무리 고개를 갸웃거려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볕 따스한 날, 차를 타고 근처에 새로 생긴 쇼핑센터에 가는 길이었다. 사거리를 지나는데 문득 눈길을 붙잡는 게 있었다. 어? 빨간 모자다! 나는 화들짝 반가워 곧장 차를 세웠다.

“안녕하세요? 근데 그동안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통 안 나오셔서 궁금했어요.”

그는 구레나룻이 더부룩했다. 얼굴빛이 누리끼리했고 움직임도 예전 같지 않아 보였다. 그는 눈길에 미끄러져 교통사고가 났었다고 했다. 팔다 남은 과일을 싣고 퇴근하던 밤, 눈은 내리고 길은 미끄러웠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모퉁이를 돌면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사과며 배들이 쏟아져 길바닥에 낭자했고 차도 박살이 났다. 그도 크게 다쳤다. 죽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 계절 내내 병원 신세를 지고도 아픈 몸은 쉽게 낫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돈만 까먹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웬만하다 싶어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누워 있다고 해결이 되나요? 움직여야 살지요.”

그는 다시 거리의 풍경이 되었다. 나는 지날 때마다 버릇처럼 그쪽을 돌아보곤 했다. 그가 있나 없나를 살피는 것이 내 임무처럼도 느껴졌다. 그는 졸고 있기 일쑤였다. 앉아서도 졸고 길가에 받쳐 둔 트럭 안에서도 졸았다. 웅크린 그의 몸은 한없이 초췌해 보였다. 그가 호객을 하거나 상한 과일 따위를 골라내는 모습은 보기 드물었다. 졸고 있는 그를 깨우기도 주저될 때가 많았다.

다시 겨울, 오늘도 그는 과일을 팔고 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빨간 모자가 씌워 있다. 나는 그의 모자가 보이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안됐다 싶기도 하다. 산다는 건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리는 과정이지만, 여전히 올라가야 할 산정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20년째 과일 파는 일을 반복하고 있지만, 아직도 팔아야 할 과일이 있다는 건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 시방 그의 모자가 유난히 돋보인다. 새뜻하고 짙은 빨강이 눈에 확 들어온다. 모처럼 새 모자를 샀나 보다. 머리에 쓴 모자가 칸나보다 더 붉다. 때마침 한 사람이 멈춰 선다. 그는 냉큼 손님에게로 달려간다. 봉지 가득 과일이 담기고 그가 환하게 웃는다.

실시간뉴스

많이 본뉴스

자치

전매인터뷰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