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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갓길

탁현수 수필가·문학박사

2021년 12월 23일(목) 17:40
저무는 해와 동무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종종걸음이다. 오늘처럼 진눈깨비라도 휘날리는 날은 으슬으슬 마음까지 스산하다. 도시의 서쪽 끝, 산과 강물로 둘러싸인 동네. 은근히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했는데 이런 날엔 슬며시 부담으로 다가온다.

러시아워의 혼잡한 대열에서 벗어나 비교적 한적하고 신호등이 적은 들길로 접어들었다. 조급한 마음에 조심조심 가속기에 힘을 더해 속도를 높였다. 제방을 따라 하얗게 너울거리는 억새들이 안간힘을 다해 마지막 절규를 한다. 흩뿌리는 눈발인지 풀숲인지 분간되지 않는 차창 밖 풍광 사이로 뭔가가 나풀나풀하다가 사라지곤 한다. 순간, 어인 일로 생전의 할아버지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일까. 분명 흰옷에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활짝 웃고 계시는 할아버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도리질을 하며 자세히 보니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온몸으로 찬 바람을 막아내며 걷고 있다. 허술한 입성에 갈래머리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 언저리가 시리도록 하얗다. ‘○○ 유치원’이라고 적힌 가방을 등에 메고 잔뜩 웅크려서인지 몸이 한 줌이나 될 만큼 작디작다. 이 길로 접어든 이상 번화가가 있는 동네까지는 아직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춥고 늦은 시간에 저 어린것이 무슨 연유로 이 벌판을 헤매는 것일까. 화원이며 주택이며 인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혼자 걷기에 적당한 길은 결코 아니다. 더구나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등하굣길도 아침저녁으로 차에 태워 나르는 것이 요즈음 부모들이 아니던가.

멈칫멈칫 아이 옆에 차를 세워 보았다.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제 갈 길만 재촉한다. 어쭙잖은 모성 때문인지, 아니면 추억의 편린들이 스멀스멀 피어났는지 따뜻한 차 안으로 그 작은 몸을 안아 올려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아들아이가 어렸을 적에도 모르는 사람이 차를 타라고 하거나 따라가자고 하면 무조건 거절해야 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타이르지 않았던가. 저 아이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듯싶다. 무엇보다 더 큰 이유는 아이 스스로 해냈으면 하는 고집이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눈치채지 않게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속도 조절을 했다. 그렇게라도 아이와 함께 있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학교에 다녔던 나는 해 질 녘에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내륙 산간에 있는 내 고향은 겨울이면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해는 또 왜 그렇게 빨리 떨어지는지 늘 어둡고 무서웠다. 버스에서 내려 십 리 가까이는 족히 걸어야 하는데 책가방을 꼭 움켜쥔 손바닥에 땀이 날 만큼 온 힘을 다해 뛰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겨우 비석거리 모퉁이를 돌아설 때쯤이면 눈사람처럼 허연 할아버지께서 우뚝 서 계시곤 했다.

“할아버지!”

있는 힘을 다해 할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을 때처럼 천하를 얻은 것 같았던 순간이 또 있을까. 행여 눈에 발이라도 빠질세라 앞장서서 연신 길을 헤치시던 할아버지.

이 늦은 귀갓길에 왜 저 여자아이 옆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환영이 보였을까. 아이에게도 할아버지처럼 든든한 마중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일까.

동동걸음을 하던 아이가 어느새 동네 모퉁이를 돌아들고 있다. 차를 옆으로 슬그머니 붙이고 보니 새하얗던 목덜미며 콧잔등이 새빨갛게 얼어 있다.

“꼬마야, 이렇게 늦게 어디 가니?”

“할머니 집에 가요. 할머니가 아프대요.”

“엄마, 아빠는?”

“일하러 가셔서 늦게 와요. 할머니하고 자고 내일 여기서 유치원에 가려고요.”

“후-유!”

나도 모르게 긴 호흡이 터져 나왔다. 저 작은 아이의 귀갓길 마중꾼들이 모두 무사하게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안도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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