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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남의 '영화 속 나머지 인간' <12> 피아니스트

전쟁 속 예술과 인권, 존엄과 가치의 경계
예술가의 거울로 보는 전쟁의 본질
인간 삶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반문
전쟁통 속에서 예술이 가지는 의미

2021년 12월 16일(목) 20:00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는 전쟁 속 예술과 인권, 존엄과 가치의 경계에 대한 많은 질문과 고뇌를 던지는 영화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라는 삶의 이유를 반문하게 만든다.

특히 영화는 한 장의 포스터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삭막한 거리에 홀로 서 있는 한 남자. 불에 타 재만 나부끼는 텅 빈 도시. 그리고 남자는 삶의 중심을 잃고 흐느적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간다.

포스터를 걷어내고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유명한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다 폭격을 당해 도망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후 유대인인 스필만과 가족들은 게토(ghetto)에서 생활하지만, 결국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된다.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보내고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는 허기, 추위, 고독, 공포 속에서 마지막까지 생존을 이어간다.

나치 세력이 확장될수록 그를 도와주던 몇몇 사람마저 떠난다. 완전히 혼자가 된 그는 자신만의 은신처인 폐건물에서 끈질기게 생을 유지한다. 그러던 중 독일군 병원 앞 작은 아파트로 숨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먼지 묻혀있던 피아노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스필만은 감격 속에 피아노를 열지만, 건반을 누르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리고 상상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얼마나 그리워하고 원했던 피아노 연주였는지 인식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소리도 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의 피아노 소리는 관객에게 뭉클한 감동과 예술의 힘을 전달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이어오던 스필만은 순찰 중이던 독일 장교 빌헬름 호젠펠트에게 발각된다. 독일 장교는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고 스필만은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주한다. 지상에서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르는 순간, 모든 영혼을 손끝에 실어 연주를 시작한다. 스필만과 독일 장교의 만남이 영화의 백미를 장식한다.

영화는 피아니스트 스필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세계 2차대전 당시 유대인인 그가 독일 치하에서 살아남은 과정을 사실 그대로 담는다. 실화만이 가지는 독특한 힘이 느껴진다.

이 때문에 인간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생명과 존엄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파리목숨으로 사는 유대인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더욱이 한 명의 예술인의 삶을 통해 예술의 가치를 생각하게 만든다.

피아니스트는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반면 영화의 구도는 단순하다. 그러나 영화가 표현해내고자 하는 주제는 깊다. 피아니스트라는 예술가의 거울을 통해 전쟁의 본질과 예술의 가치를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피아니스트와 독일군 장교라는 대비를 통해 인류애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면에는 유대인이란 신분 하나만으로 살상을 당해야 하는 인종주의와 전체주의를 고발한다. 국가의 죄악을 고스란히 덮어쓴 장교의 모습에서는 연민마저 느끼게 한다.

이와 함께 영화는 전쟁을 통해 뉴 노멀(New Normal)에 대한 인식을 생각하게 만든다.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떠오르는 기준 혹은 표준을 경제학에서 뉴 노멀이라 부른다.

전쟁은 평시와 다른 뉴 노멀을 요구한다. 여성보단 남성, 아이보단 어른, 노인보단 청년이 중요시된다. 군인, 경찰, 관료의 위상이 올라가고 학자, 문인, 예술가는 사회의 나머지로 밀린다. 피아니스트 스필만도 전쟁 속에서는 사회적으로 나머지 인간일 뿐이다.

더욱이 영화는 끊임없이 생(生)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삶의 이유가 사라진 스필만이지만 게토를 탈출하고, 자신을 감금한 채 빵 한 조각으로 몇 주를 버티고, 병을 이겨내며 고단한 생을 연명한다. 그에게 생의 목적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살아내야 한다는 데 있다.

전쟁이 끝나고 스필만이 관현악단과 함께 쇼핑 곡을 연주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영화는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것이 삶의 이유라고 전달할 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뭘 할 텐가?”

“연주를 해야죠.”

/사진 출처 = ㈜씨네월드,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쇼팽의 발라드와 OST’

- 마음을 울리는 피아노 선율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 중 음악은 중요한 장치 중 하나다. 적재적소에 삽입된 음악은 영상과 조화를 이뤄 환상의 궁합을 만들어낸다.

피아니스트는 영화 OST의 정석 중 하나로 꼽힌다. 전쟁으로 완전히 무너진 도시 속에서 적군에게 들려주는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주인공의 쇼팽 피아노 음악이 마음을 울리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모두 10곡의 피아노곡이 연주되는데 모두 쇼팽의 곡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쇼팽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한다.

이 영화는 조용한 피아노 연주로 시작된다. 스필만은 라디오 방송에서 쇼팽의 야상곡 20번을 연주하는데, 연주 도중 라디오 방송국이 폭격당하고 독일군에게 점령당한다. 이 곡은 쇼팽의 녹턴 중에 가장 유명한 곡이다.

묘하게 이 곡은 영화 마지막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독일이 패한 후 방송국에 복귀한 스필만이 바로 쇼팽의 야상곡 20번을 연주한다. 죽음의 위기를 넘고 자유를 찾은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피아노 연주에는 평온함과 함께 은근한 슬픔마저 담겨 있다.

특히 쇼팽의 발라드 1번이 연주되는 부분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폐건물에서 은신 생활을 하던 스필만이 독일 장교에게 발각된다. 연주를 명령하는 독일 장교에게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해준다.

폴란드 태생인 쇼팽을 생각하면,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 쇼팽의 발라드를 영화음악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울리는 감미로운 선율은 전쟁의 암담함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슬프고 절망스럽지만, 희망이 담긴 이 곡은 듣는 관객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관객이 영화 포스터 속 길을 잃은 한 남자의 마음에 다가서는 순간이다.

한편 발라드는 자유로운 형식의 서사적 음악이다. 독일 중세 가곡의 형식이며, 서정적인 특성이 있는 리트(독일의 가곡)를 쇼팽과 브람스가 기악화해 만든 것이다. 쇼팽은 발라드 1번을 슈만 앞에서 연주하며 천재성을 인정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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