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찾기 추가
닫기
바닥의 힘

박덕은 문학박사·화가·전 전남대 교수

2021년 12월 15일(수) 17:44
박덕은
산길을 걷는데 길 한가운데 피어난 질경이꽃이 유난히 예쁘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라 온전한 초록 잎사귀가 거의 없다. 잎사귀 같은 온몸이 발길에 채여 멍들고 아팠을 텐데도, 꽃은 아픈 내색 없이 활짝 피어 있다. 독 오른 뱀처럼 대가리 꼿꼿이 치켜든 신발이 다가오면 질경이의 심장은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두려움에 떨다 뒷목이 뻣뻣해진 잎사귀를 짓밟아 뭉갤 때마다, 질경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몸져누울 법도 한데, 활짝 핀 아픔을 제 꽃빛에 숨긴 채 질경이는 꽃을 피우고 있다.

저 질경이처럼 생의 가장 밑바닥에서도 자신의 삶을 꽃피우는 사내를 만난 적이 있다.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서 일을 보고 저녁 무렵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음료수 하나 사들고 택시 승강장 쪽으로 걸어갔다. 승강장 바로 앞에는 두 다리가 불구인 한 사내가 깡통을 앞에 두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바닥에서 태어나 춥고 질긴 그 바닥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끌어올려도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고마는 그 바닥이 그의 일터였을 것이다. 무릎을 꿇은 공손한 두 손이 노동의 바닥이 된 채.

주머니를 뒤져봤는데 동전이 없었다. 천 원을 꺼내 깡통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내 손에 쥐어진 지폐는 오천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그 순간 아까운 마음에 오 천원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싶었지만, 어쩐지 어색해서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결국 육 천원이 깡통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잠깐의 망설임을 나무라는 듯 지폐는 소음성 난청에 시달린 세상을 뒤로하고 침묵의 집 한 채 같은 바닥에 몸을 뉘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바닥이 두 장의 종이 이불 지폐로 온기가 돌았다. 종이 이불 바깥으로 까맣게 빛나는 바닥의 발가락이 삐죽 나와 있었다.

그때 그가 나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모두들 동전을 던져 주는데, 육 천원을 준 자가 누굴까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와 그의 눈빛이 마주쳤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끝끝내 버틴 어떤 바닥의 근성이 몸에 배인 듯했다. 저 사내도 모든 걸 내려놓고 추락하고 싶은 날이 있었을 텐데,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받아준 그의 바닥은 무엇이었을까. 두려움에 떨다 지친 등을 받아 준 그의 내밀한 바닥이 궁금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가 이렇게 말했다.

“관상을 보건데, 물장사를 하면 대박 치겠네요.”

그의 목소리에서 수만 번의 바닥을 치고 올라온 어떤 힘이 느껴졌다. 그 말이 계기가 되어 나는 잠시 얘기를 나눴다. 물장사라는 말은 그에게서 처음 들었다. 관상을 잘 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대에게 좋은 기운을 실어 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버거운 삶의 바닥에서 일어서기 위해 아등바등했지만, 눈을 뜨면 늘 바닥이었다. 사실 나도 저 사내처럼 거부할 수 없는 바닥이었다.

그는 나에게 노년에는 일이 잘 풀릴 거라고 했다. 바닥이 바닥에게 건네는 따스한 말 한마디에 잠시 위로를 받았다. 그는 주말에는 터미널에 있고 평일에는 백화점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하지 않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그 여자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소망을 얘기했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단맛 같은 사랑에 입안이 간지러운지 그는 깔깔깔 웃었다. 그의 입술에서 달콤한 희망이 서서히 묻어나더니 입꼬리가 발랄해져 갔다. 그의 아픔을 키운 것도 바닥이고, 그의 사랑을 키운 것도 바닥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바닥은 아픔 많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 사랑으로 감싸며 둥근 파문을 만드는 존재다.

하얀 질경이꽃이 화사하다. 터미널에서 만났던 사내의 꿈처럼 꽃빛이 곱다. 여름의 전사 같은 저 질경이꽃은 더는 내려갈 데가 없으니, 이제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당겨서라도 일어서라는 바닥의 말씀 같기도 하다. 짓밟힐수록 뜨거워지는 바닥의 힘이 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질경이도 터미널의 그 사내도 모두 바닥에게 기대어 아파하면서 울면서 용기 내면서, 다시 일어설 힘을 키웠으리라. 어느 날 문득 내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니 바닥이 온몸으로 나를 받아 주었던 것이다. 웅크리며 떨고 있던 나를 바닥은 감싸 주며 품어 주었던 것이다.

뜨거운 바닥이 피워낸 질경이꽃으로 길은 온통 환하다. 그 사내의 사랑이 꽃피어나듯 바닥에서 시작된 6월이 오늘따라 유달리 출렁거린다.

실시간뉴스

많이 본뉴스

자치

전매인터뷰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