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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

박덕은 문학박사·화가·전 전남대 교수

2021년 11월 17일(수) 18:06
책장 위에 올려놓고 잊고 있었던 화병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물을 갈아 주고 한 묶음의 가을 절정을 다시 화병에 꽂는다. 지상과 허공 사이의 간극에 물오른 가을 신화를 펼쳐 놓는 국화꽃들로 10월은 뜨거워지고 있다. 저 향기로운 빛깔은 언제부터 삶에 대해 확신이 서 있었을까. 부러워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말대꾸처럼 또박또박 시든 국화꽃이 보인다. 그 시든 국화꽃은 제 심장을 밤하늘에 다 쏟아놓고는, 죽음의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허무를 겹겹이 두르고 있다. 시든 꽃을 받치고 있던 꽃대궁이 속앓이했는지 뭉그러져 있다. 지난 4월의 내 모습처럼 애잔하다.

팔딱팔딱 튀는 빙어처럼 가을빛이 파닥거리는 꽃망울을 들어앉힐 때, 꽃대궁은 내일을 꿈꾸었을 것이다. 어떤 색과 향기를 품을까 고민하며, 꽃대궁은 화병이 풀어놓은 꼬리지느러미 반짝이는 가을 물결을 길어 올렸을 것이다. 무지갯빛 미끼 같은 짧은 개화일지라도, 만개한 그날을 위해 찰랑찰랑 물소리를 길어 올렸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깡마른 꽃의 생애가 휘청거리며 지고 있을 때, 꽃대궁은 슬픔을 참느라 속이 뭉그러졌을 것이다.

4월의 그날은 자식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나의 죽음을 미리 조문해야 했던 국화꽃과 같았다.

4월 23일 밤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왼쪽 다리의 마비 증상 때문에 급히 응급실로 갔다. 뇌출혈 때문에 마비 증상이 올 수 있다기에 CT촬영을 했다. 의사는 다행히 뇌출혈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 인생 속으로 더이상의 불행은 끼어들지 않을 거라며 위로해 주는 듯한 의사의 말 한마디가 고마웠다. 주름져 서러워진 시간이 아득히 늙어 가고 있었기에, 나는 가벼운 바람에도 쉬이 넘어지곤 했다. 사는 게 힘들어 하루하루가 비탈이거나 절벽이었기에, 노년의 마음자리만큼은 그늘이 없기를 바랐다. 아픔에게 덜미를 잡혀 서러움의 한복판으로 다시는 압송되고 싶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 내쉬며 일어서려는데 의사가 다시 불렀다. 자기는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에, 전문의의 의견을 들어본 뒤, 정확한 결론을 내리겠다고 했다. 카톡으로 전문의와 CT촬영 사진을 주고받던 의사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뇌출혈이 의심된다고 했다. 그 순간, 상황은 급변했다. 간호사들이 각자 대바늘 주사기 하나씩 들고 몰려오고, 나는 소용돌이치는 혼란 속으로 쑤욱 빨려들어 갔다. 그때 나는 불안과 불안 사이를 걷는 밤의 제단 앞에서 바락바락 악을 쓰며 대들고 싶었다. 아니, 겁먹은 짐승처럼 바짝 엎디어 목숨을 구걸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게 거짓말일 거라며 부정할 때마다, 달빛은 죽은 피처럼 굳어 갔다. 4월의 밤은 아직 오지도 가지도 않은 봄 때문에 길 잃고 넘어져 아파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을 다투는 응급 환자 되어 큰 병원으로 가는 앰뷸런스에 실렸다. 병원에 도착한 후 MRI촬영과 CT촬영을 연달아 했다. 서너 시간 뒤에 검사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사면이 커튼으로 둘러처진 관(棺 )같은 이동 침대에 누워 조바심 안고 기다렸다. 뇌출혈 수술을 하다가 종종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기에, 기다리는 내내 무서웠다.

얼마 전에 지인의 영결식에서 국화꽃을 헌화하며 애도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나의 죽음을 애도해야 했다. 삶에 흥건히 젖어 보지도 못한 채, 나는 나 자신을 조문해야 하는 한 송이 국화꽃이 되어 갔다. 내가 끌고 온 아픔과 아픔 사이를, 눈과 눈 사이를, 당신과 나 사이를 국화꽃으로 덮어야 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 국화향이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한때 내 가슴에 사랑이라는 꽃불을 놓아 심장을 뛰게 했는데, 이제는 꺾인 나를 받치고 있는 국화향이 코끝을 스쳐갔다. 시간을 뛰어넘어 누가 울고 갔을까, 국화향이 몹시 짙었다.

새벽 3시 반경에 의사가 커튼 한 쪽을 열고 들어왔다.

“다행히 뇌출혈은 아닙니다.”

화병 속의 국화꽃은 지금 당장 죽음이 들이닥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화사하게 피어 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밀쳐내고 꽃을 피우기 위해, 꽃대는 얼마나 많은 희망을 밀어 올렸을까. 최선을 다한 삶의 희망이 꽃으로 피어났을 것이다. 희망은 마음속에 살고 있는 꿈 많은 고래와 같아서 푸른 바다를 꿈꾸다 쓰러지더라도, 우리의 안간힘이 지느러미가 되어 다시 솟구치게 한다. 내게 달라붙은 죽음의 그림자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저 국화꽃처럼 최선을 다해 삶의 희망이라는 꽃을 피워내야 하겠지. 푸른 바다를 누비는 마음속 고래, 그 희망이라는 국화향이 어느새 쏜살같이 저 해협을 건너왔는지, 방안 가득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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