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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노래

김향남 수필가·문학박사

2021년 11월 10일(수) 16:59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네. 아장거리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고 그만큼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쌓인 곳이지. 거기 머문 동안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네. 어울려 지내던 이웃들이 쏙쏙 빠져나가곤 해도 나는 마땅히 이유가 없었다네. 지내기에 불편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새집을 원하지도 않았어. 식구들 돌보랴 일터에 나가랴 늦깎이 공부하랴 딴 데 마음 둘 수도 없었다네. 나를 붙잡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지.

창밖의 벚나무는 나날이 새로웠네. 꽃피어 화르르 날리는가 싶으면 초록이 짙어졌고, 절정이다 싶으면 금세 나목이 되곤 했어. 운치 좋은 정자도 있었다네. 지붕 위로 노란 은행잎이 내리거나 소복하게 흰 눈이 쌓일 때면 마음조차 두근거리곤 했었지. 뒷산도 좋았어. 해발 300m도 안 되는 야트막한 곳이지만 숨차게 걸어보고 싶거나 멀리까지 조망하고 싶을 때면 언제라도 내달릴 수 있는, 그 동네의 명산이었다네.

늘 다니는 거리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네. 없던 가게가 새로 생기고 있던 가게가 없어지기도 했지. 과일 팔던 노점 아저씨는 20년도 넘게 그 자리에 있었는데 며칠씩 뜸하다 싶더니 아예 볼 수가 없었고, 채소 팔던 노부부도 마찬가지였지. 이발소도 문구점도 분식집도 사라졌어. 길모퉁이 식당은 카페로 변신을 했더군.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지.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것들을 기웃대며 걸을 때면 더러는 아쉽기도 하고 더러는 설레기도 했으니까.

동네 산책로도 진짜 멋졌지. 나무와 쇳덩어리가 어우러진 미술 작품 같았다고 할까. 바깥쪽은 철제 벽을 높이 세워 차들의 소음을 차단하고, 안쪽은 곧게 뻗은 나무 사이로 하늘을 드리웠어. 막히고 트인 그 사이로는 데크를 깔아 길을 놓았지. 그대로 두었더라면 온갖 소음에다 오물이나 내던져진 쓰레기장에 불과했을 텐데, 누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걸을 때마다 감탄했지. 키 큰 메타세쿼이아 아래 맥문동꽃이 피거나 꽃무릇이 일제히 붉디붉게 뒤덮이면, 누구라도 불러내서 함께 걷고 싶었네.

뜻밖에 그곳을 떠나게 됐다네. 스스로는 나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누가 내 등을 철썩 떠밀어주었지. 30년 가까이나 한곳에 살다 보니 엉덩이조차 무거워져 버렸나 보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어. 나 역시 나그네였을 뿐인데 말이네. 어쨌거나 나는 떠나야만 했다네. 머뭇거릴 수도 없었지. 오직 다음 여정이 있을 뿐이었어. 하마터면 그 동네 터줏대감이 될 뻔도 했는데, 진짜 살아있는 전설이 될 수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미수에 그치고 만 셈이지.

지금 나는 여기 있네. 앞에는 산이 있고 조금만 나가면 강변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지. 어느새 나는 그 동네 그 집을 다 잊어버린 듯 온통 여기에 쏠려 있네. 그토록 오랜 나날들도 한순간처럼 느껴진다네. 나의 사랑, 나의 행복. 아, 나의 슬픔이 돌돌 여울져 흐르는 곳. 풀어헤치면 소설 몇 권은 되고도 남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는 지금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온 듯 완전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있다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네. 내 앞에는 바야흐로 새바람이 불고 있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바람일세. 세차게 불지 약하게 불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 아마 그건 누구도 모를 거야. 바람은 다만 불고나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네.

오늘은 강변길을 걷는다네. 저 다리까지만, 저 나무 아래까지만 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네. 주머니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 있네. “…하루의 첫음절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이별한 두 형제, 과일처럼 매달린 절망,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神)과 기도/미열과 두통, 접착력이 좋은 생활, 그리고…

바람은 서늘하고 길은 끝없이 이어지네. 길가에는 억새가 나부끼고 산국이 피어 있네. 새떼가 날고 구름이 피어나네. 내 손은 자꾸만 주머니를 더듬네. 지금 나는 길 위에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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