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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

박덕은(문학박사·화가·전 전남대 교수)

2021년 10월 20일(수) 18:50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왼쪽 엄지발가락이 살살 아파온다. 퇴근 후에 양말을 벗다 말고 왼발을 살핀다.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 쪽으로 휘어져 있고, 엄지발가락의 관절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뭉툭한 모양새가 나무의 몸에 박힌 옹이 같다. 서러운 제 속내를 소리 없이 꺼내놓기라도 하는 듯 돌출된 관절이 빨갛게 부어 있다. 슬픔이라는 바닥짐을 지고 혼자서 외로이 여기까지 걸어온 무소의 뿔 같기도 하다. 살아온 내력은 이리도 선명히 좁은 틈 비집고 아픔을 내민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태권도장에서 대련을 했다. 나의 옆차기 공격을 방어하는 상대방의 주먹에 맞아 엄지발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몹시 아파 절뚝거리며 집으로 왔지만, 혼날까 봐 어머니에게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말하지 않았다. 입술과 혀를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피워 올린 소통이라는 꽃은 자꾸만 꺾여졌다. 그 꺾인 꽃을 숨기고 웃음으로 흑백을 뒤집어쓰며 생활했다. 나는 서서히 꽃을 잊어 갔고 꽃도 나를 잊어 갔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왕따였다. 어머니는 탯줄도 자르기 전에 갓난아기인 나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다. 어머니는 두고두고 나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생긴 게 꼭 흑인 같았어. 그래서 발로 슬그머니 밀쳤지.”

출생과 동시에 나는 삶에 지친 어머니의 모든 짜증과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로부터 미움받아 마음의 가지가 꺾인 채 아파하다 가슴에 옹이가 생겼다. 바람의 노래를 부르던 마음의 잎사귀는 시들고, 햇살에 찰랑대던 마음의 음표들은 사라졌다. 눈먼 그늘이 쌓이고 혀끝을 굴리면 비릿한 말만 서걱였다. 잔뜩 웅크린 외로움이 아픔 들키지 않으려고 삐에로의 웃음을 걸음 걸음 흘려놓았다.

나무도 사람도 꺾인 곳이 아픈 법이다. 꺾인 아픔은 안으로 숨어들지만, 더이상 숨을 수 없어 터질 듯 튀어나온 상처는 옹이가 된다.

하루는 송판에 새겨진 옹이에 눈길이 갔다. 옹이가 진한 색을 띄고 있길래 죽은 옹이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산 옹이었다. 죽은 옹이는 죽은 가지를 감싸면서 생기지만, 산 옹이는 살아 있는 가지가 나무의 몸 속으로 말려들면서 만들어진다. 가지에 새겨진 햇살의 수다와 꽃을 꿈꾸었던 기다림과 하늘 향해 뻗었던 손목이 나무의 몸속으로 말려들어간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저 캄캄한 나무의 몸 속에서 가지는 좌절했을 것이다. 새소리 받아줄 귀를 잃고 아침 이슬 들어줄 팔을 잃어 슬펐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그 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지는 바깥 세상과 단절했을 것이다.

나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꼬일 때면 꼬인 부분을 풀려고 하지 않고 단절을 택했다. 나를 가장 철저히 보호할 수 있는 게 단절이었다. 단절이라는 가위질은 관계라는 옷감을 손볼 때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재단법이었다. 이음새까지 잘라 버렸기 때문에, 상대방의 감정이 내게 스며들지 않았다. 가윗날 스치는 단절은 더이상의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나의 몸부림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불통과 고집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 불통과 고집 때문에 생의 많은 길들이 꺾여져야 했다.

결혼하고 아이가 서너 살 되던 무렵이었다. 시골집에서 점심을 먹고 느지막이 뒷동산에 올랐다. 오솔길 걷다가 걸음이 문득 멈춰졌다. 이 근방이 맞을 게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바로 위의 형이 세 살 때 묻힌 자리. 어머니는 널무덤 같은 흙을 열고 형의 울음을 이곳에 앉혔을 것이다. 상여꾼도 없이 수의 입은 노을만 꽃상여 타고 서천으로 갔을 것이다. 어머니의 붉은 울음이 그 뒤를 따르고 저녁의 등에 업힌 요령 소리만 뎅뎅 울렸을 것이다.

내게 자식이 있기 전에는, 죽은 형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아픔을 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생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갔던 슬픔이 어머니의 심장에 옹이로 박혀 있다는 걸 몰랐다. 늑골마다 서러운 바람이 들어차, 어머니의 가슴은 때때로 위태로운 바람길이었을 것이다.

옹이 같은 엄지발가락 관절에 향나무 오일을 바른다. 통증이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무 중에서도 특히 향나무는 옹이가 많다. 향나무 옹이는 제 몸을 태워 향료를 만든다. 일생을 바친 인고의 시간이 피워낸 거룩한 향기다. 등신불처럼 서슴없이 소신공양한 옹이. 그 숭고한 희생의 십자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제는 단절과 불통의 옹이가 아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나무 옹이처럼 향기 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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