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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게 하소서

정태헌(수필가)

2021년 08월 25일(수) 08:45
첫 손주가 태어났다. 새벽길을 재촉해 달린다. 서울까지 가려면 서너 시간이나 걸리는데 버스는 굼벵이다. 시간이 왜 그리도 더디 가는가. 마음속으로 버스를 채찍질하여 도착한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면회 시간에나 볼 수 있단다. 그 앞에서 바장이는데 때가 되자 신생아실 커튼이 걷힌다. 유리창 너머 아이는 눈을 감고 있다. 새싹 같은 손가락이 사랑옵다. 투명한 눈두덩은 반짝이는 윤슬 같다. 손차양하고 요리조리 살피는데 눈치라도 챘는가. 꽃잎 같은 입술을 열며 빨간 울음을 터뜨린다. 소리는 옹골찬데 눈물이 보이질 않는구나.

아직은 신경이 발달하지 않아서겠지. 아이의 눈물을 얼른 보고 싶다. 눈물을 흘려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의 시작이리라. 새롭게 돋아나는 기쁨의 눈물을 만지고 싶다. 걱정하지 않아도 차츰 눈물을 일구어 가리라. 그래 기다리자. 첫 눈물은 기쁨의 갈피에 들어 있을 테니까. 저편 기억의 페이지에서 다른 울음소리 들려온다.

한낮 산길에서 만난 그 울음을 아직 잊지 못한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데 비가 쏟아진다. 나뭇잎을 밟으며 달리는 빗소리 호도깝스럽다. 위쪽에서 무슨 기척이 들린다. 귀 기울이니 꺾쇤 울음을 토해내는 소리다. 상수리나무 밑에 거뭇한 물체가 보인다. 찬찬히 살펴보니 허우대가 멀쩡한 젊은 사내다. 나무 둥치를 껴안은 채 어깨를 들썩인다. 울음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처연하다. 평일 대낮, 비가 오는 숲속에서 등산복도 아닌 양복 차림이라니. 어쩌면 사내는 비가 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방해될 듯싶어 더는 오르질 못하고 무춤 서서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얼마 후 사내는 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다. 재킷을 벗어들고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고갤 떨구며 피식 웃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절망과 패배의 눈물만은 아니리라. 그래 울어라. 가년스러운 눈물이 토실토실 살지도록 더 울어라. 통절한 울음은 아직 뜨거움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눈물은 말 없는 슬픔의 언어다. 눈물로 씻기지 않을 슬픔이 어디 있으랴. 언젠가는 자기가 흘린 눈물에 의해 스스로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테다. 사내는 그때의 눈물을 지금쯤 보상받았으리라.

혹시 모르니 손수건을 준비하란다. 원작소설을 읽고 각색한 영화를 본 후 토론하는 모임에서다. 왼쪽 가슴을 눌러둔 지 오래된 터라 시큰둥했는데, ‘혹시’가 그만 시나브로 밀려들고 만다. 영화가 후반으로 넘어서면서 자세를 바로잡는다. 자식이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장면이다. 눈시울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목울대가 얼얼해지더니 뜨거운 기운이 우꾼하게 올라온다. 어둠 속에서 몇 번이고 눈가를 닦아내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더는 어쩔 수가 없다. 어느 골짝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솟아오른 것일까.

눈물만큼 빨리 마르는 것은 없다고 해서 눈물이 가볍던가. 눈물은 슬픔의 말없는 언어라 해서 함부로 말하려 드는가. 눈물로 빵을 먹어 보지 못했다고 인생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가. 여자의 눈물에 속지 말라 해서 눈물을 경계할 것인가. 행복이 더할 나위 없을 때는 미소와 눈물이 함께 한다 해서 눈물을 미소와 같은 동급으로 보려는가. 인류가 협의하는 지상의 모든 언어 중에서 눈물이 최고의 발언자라 해서 눈물을 무기로 삼을 것인가.

눈물을 단속하며 근엄한 척하는 파수꾼들은 물러가라. 아이가 빨리 눈물의 속살을 배웠으면 좋겠다. 사내는 힘겨울지라도 그날의 눈물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눈물은 나약함이 아니라 뜨거움이고 천박함이 아니라 고결함이다. 눈물은 영육을 정화하고 치유한다. 가슴이 무딘 사람은 절제보다는 무감각이요 차가움이다. 눈물은 생의 순도와 열도를 높인다.

자신에게조차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제 견고함을 자랑하지 말 일이다. 눈물은 기쁨과 슬픔이 차려놓은 따뜻한 초대다.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에도 투명한 눈물이 샘솟기를 소망한다. 이젠 생의 앞자락에 결 고운 눈물을 낱낱이, 그리고 허물없이 풀어놓으리라. 당신의 눈물 온도는 시방 몇 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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